아라비아 숫자가 전세계로 퍼진 이유?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아라비아 숫자가 전세계적으로 퍼진 가장 큰 이유는 이탈리아의 수학자 피보나치가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 사회에 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피보나치 수열로 유명한 그 피보나치가 맞습니다.) 이전까지 유럽은 로마 숫자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피보나치의 "주판서"라는 책에 의하여 아라비아 숫자가 유럽에 소개되게 됩니다. 로마의 숫자보다 아라비아 숫자가 더욱 사용하기 편리하였고, 특히 "0"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학적으로도 사용하기 더욱 쉬웠습니다. 그로 인해 유럽 사회에서 아라비아 숫자를 중심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유럽의 세계 진출로 인하여 전세계적으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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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세계화는 지역 고유성을 약화시키는 결과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질문자님의 내용에 그대로 있듯이 문화의 정체성이 희석될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문화의 세계화가 무조건적으로 고유성을 약화시킨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대표적인 예시로 하자면 일본의 스시를 들 수 있습니다. 초밥은 일본어로 스시라고 부르는데, 일본에서 스시를 홍보할 때 본인들의 고유 명사인 "스시" 그대로 홍보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진출을 위하여 주력 상품으로 내세운게 "캘리포니안 롤"이었습니다. 스시와 제작법이 유사하지만 아보카도를 사용하여 미국인들에게 쉽게 다가갔고, 이것이 스시를 알리는 시작이었습니다. 캘리포니안 롤로 서양권에 스시가 소개되고, 이것이 유행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 고유의 스시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서양권에서 일본으로 스시를 사먹으로 여행을 올 정도로 스시는 세계적인 음식이 되었습니다.위의 사례처럼 문화의 정체성이 희석되지 않고, 고유의 문화를 세계로 알리기 위하여 세계화를 이용한 경우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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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란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어떤 역할인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이스라엘과 이란은 원래 이스라엘 건국 초기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사이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란은 원래 이스라엘과 원시간인 팔레스타인과는 다르게 중동 국가 중에서도 친미적인 성향인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1979년 이란 혁명으로 호메이니(이번 폭격으로 죽은 이란의 수장입니다.)가 집권하면서, 급격하게 반미 성향의 국가로 변화하였습니다.호메이니 집권 이후 이란은 이스라엘과 분쟁 관계에 있던 팔레스타인이나 레바논에게 군사적으로 지원하기도 하였고, 이슬람 무장 단체인 하마스나 헤즈볼라를 지원하면서 대리 전쟁을 진행하였습니다. 이는 중동에서 미국을 몰아내기 위함이었고, 이스라엘의 친미의 선봉장과 같은 국가이기에 집요하게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이전까지 이란은 위처럼 다른 국가나 단체에를 지원하는 대리전쟁으로 이스라엘과 분쟁을 하였으나, 20년대에 들어서면서 직접적으로도 부딪히기도 하면서 지금의 관계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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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사 한국사 서술형대비 방법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시험에 나오는 서술형은 거의 대부분이 답이 정해져 있습니다. 역사와 관련된 서술형에서 중요한 건, 그 정답까지의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어떠한 사건만 이야기 하는게 아니라 이전의 상황과 어떠한 경과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 어떠한 상황까지 왔는지 모두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서술형에 대해서 감점 없이 완벽한 답안을 내려고 한다면1. 문제에서 무엇을 물어보는지 먼저 파악하기2. 답을 위하여 사건 이전 상황부터 사건의 흐름에 맞추어 설명하기3. 최종 이 정답으로 인하여 어떠한 결과가 나왔는지위 3가지에 집중하여 정답을 쓰시는게 좋습니다. 단순 암기로는 위와 같은 정답을 내기 어렵기 때문에, 이야기의 형식으로 공부하는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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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오스크단어 유래가 이란에서 왔다는것이 맞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키오스크는 현재는 무인으로 주문하는 기계를 부르는 말이지만, 원래는 박스형 판매 가게들을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튀르키예에서는 이전부터 별장이나 정원 등에 건축되어 있는 작은 개방형 건물을 쾨슈크라고 불렀는데, 우리나라의 구멍가게 처럼 좌식 평상이 함께 딸려있는 작은 건물이었습니다. 이것이 서구권으로 들어오면서 키오스크라고 부른 것이 시작이었습니다.이후 유럽에서 길가에 있는 전면 개방된 박스형 가게를 키오스크로 부르기 시작했고, 작은 공간에서 판매하는 판매대를 키오스크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는 2020년대에 들게 되면서 무인 주문기계(인터랙티브 키오스크)를 지칭하는 말로 변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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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사는 지금을 무슨시기라고 부르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지금을 부르는 명칭은 현대시대로 부르고 있습니다. 사실 공룡이 있던 중생대(트라이아스기-백악기)까지는 연구에 의하여 연구자들이 붙힌 명칭입니다. 즉 사람이 나중에 명명한 시대이기에, 지금을 부르는 명칭은 현대 시대로만 부를 수 있습니다. 나중에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당시의 연구자들이 "2026년은 00시대이다" 라고 명명해줘야 어떤 시기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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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가 한국어랑 유사한 단어들이 많은데 같은 한자권이어서 그런건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일본어와 한국어는 서로 멀지 않기에 비슷한 단어가 많다고 여겨집니다. 특히 백제와 당시 왜는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기에,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도 꽤나 오랜 기간 교류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고대부터 이어져 온 교류로 인하여 사용하는 단어에서도 유사성이 생겨날 수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현재까지 많은 연구를 진행 중에 있으나, 학계에서는 다른 어족의 별도 언어로 보고 있습니다.사용 문자는 한자를 기반으로 사용하였기에, 한자 단어는 당연히 한자 득음에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게 사용하여 유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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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의 기원은 어디이며 언제부터 사용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도장이 발견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통에 부조를 음각으로 새기고, 그대로 굴려서 개인용으로 사용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기록은 부여 시대 왕의 옥새로 "예왕지인"이라는 도장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도장은 보통 왕이나 국가 관청의 직인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나, 점차 귀족의 직인이나 거래의 확인 직인 등으로 그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그러면서 현재 개인을 대신할 수 있는 현재의 도장 형태로 변형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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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시대의 문화재는 어떤것들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현재 경주에서 발견할 수 있는 대부분의 문화재가 통일 신라 시대의 문화재 입니다.황룡사 - 현재는 복원중에 있는 대형 사찰 터 입니다. 40,000여개가 넘는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황룡사 9층 목탑을 본 뜬 건축물들이 경주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동궁과 월지 - 통일 신라 궁궐 유적 중 하나로, 문무왕대에 만들어 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라의 별궁이었으며 호수를 만들어 후원과 같은 기능을 하였습니다.석굴암 - 불국사와 같이 대표적으로 알려진 통일신라 건축물입니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도 불국사와 함께 등록되어 있습니다. 신라시기에 수많은 석굴들이 지어졌는데, 가장 정교하게 제작된 석굴 사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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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 타지마할 이라는건축물이 있는데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타지마할은 옛 인도의 제국 중 하나였던 무굴제국의 5대 황제 샤 자한과 그 황후인 뭄타즈 마할의 묘입니다.당시 무굴제국은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시기였으며, 샤 자한은 엄청난 애처가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내인 황후 뭄타즈 마할이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그 상실감을 묘역을 짓는 것으로 달래었다고 합니다. 타지마할은 완공까지 22년이 걸렸고, 페르시아부터 유럽까지 다양한 기술자와 장인들이 초청되어 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최고의 전성기였던 무굴제국의 재정이 파탄 직전까지 갈 정도로 엄청난 비용이 소모되었고, 완공 후 5년 뒤 샤 자한은 무리한 공사로 인한 시민들의 불만+재정파탄+아내의 사후 정사를 돌보지 않는 등 암군의 모습으로 인하여 아들이 강제로 폐위시켜 쫒겨나게 됩니다.원래는 타지마할은 아내를 위한 묘로 제작이 되었으나, 이후 샤 자한이 죽고 아내 뭄타즈 마할과 같이 타지마할에 뭍히게 됩니다. 그래서 타지마할에 가보면 석관이 있는 방은 좌우 대칭으로 되어 있지 않은데, 원래는 아내만 두려고 한 방에 샤 자한도 들어가게 되면서 그렇게 지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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