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서도 사극에서나오는 우리말로 대화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에도 한국어(우리말)을 사용하였습니다. 한글 창제 이전, 문자로는 한자를 사용하긴 하였지만, 언어는 한국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같은 한자 문화권인 중국과 일본이 서로 말이 다른 것 처럼, 한국도 고유의 한국말을 사용하였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한국어에 대한 기록은 중국 전한 말기에 [방언]이라는 책에 처음 나왔는데, 고조선 지역의 32개의 단어로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한자 문자를 우리 한국어로 변경하여 사용하기 위하여, 이두라는 별도 문자 체계를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한자의 음훈을 활용해서 한국어로 발음하고 읽을 수 있게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평가
응원하기
고려시대에 몽골이 우리나라를 공격한 이유와 경과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 몽골과의 여몽전쟁은 총 9차례 전쟁을 진행하였습니다. 여몽전쟁의 발단은 요나라(거란족)과의 전투에서 시작합니다. 몽골에게 밀린 거란족 잔당은 중원에서 밀려나와 한반도 위쪽에 동요라는 나라를 세우고 고려를 침공합니다. 이때 몽골은 거란족의 잔당을 토벌하기 위하여 고려땅에 들어오는데, 의도하진 않았지만 고려-몽골 연합군으로 동요의 군대를 소탕하게 됩니다. 이때 몽골은 "우리가 은혜를 주었다"는 명분으로 고려에게 해마다 공물을 요구하였고, 이로 인해서 몽골에 대한 고려의 인식은 안좋아지게 됩니다.이후 몽골의 사신이었던 저고여가 고려에서 몽골로 귀국하던 중 피살을 당하게 됩니다. 몽골에서는 고려의 소행으로 여겨 배상을 요구하였으나, 고려는 국경선 근처에서 일어난 사건이기에 금나라 영토에서 벌어진 살인이라 주장하며 이를 무시하게 됩니다. 그로 인하여 몽골이 고려를 침입하게 되는데, 이게 여몽전쟁의 시작입니다.당시 고려는 무신정권 시기로, 최고 권력자였던 최우는 본인의 권력을 잃고 싶지 않아 결사 항쟁을 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1차 침략 이후 수도를 강화도로 옮김으로써 수군이 약한 몽골에게 항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몽골이 반복적으로 침공을 해 온 이유는, 전쟁 이후 강화의 조건으로 몽골은 고려 왕의 입조와 왕자를 볼모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으나 고려가 끝까지 무시하였기 때문입니다. 몽골 군사를 물리게 하기 위하여 약속은 하였으나, 이행하진 않았기에 몽골은 계속 침략해서 오게 됩니다. 실제로 왕자를 볼모로 보낸 적도 있었는데, 이때도 진짜 왕자가 아닌 왕족 출신의 사람을 왕자로 속여서 보내기도 합니다.여몽전쟁은 고려 무신정권이 끝나면서 당시 고려 왕이었던 원종이 항복함으로 끝나게 됩니다. 무신정권의 막바지 권력자들이 끝까지 항복을 부정하며 난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삼별초의 난 입니다.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개인사병 친위대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채택 받은 답변
평가
응원하기
고려 4대왕 광종은 어떻게 왕권을 강화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광종의 왕권 강화책으로 많이 알려진 것은 노비안검법과 과거제의 실시 입니다.노비안검법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양인으로 면천시켜 주는 제도였는데, 겉으로는 후삼국-고려로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신분제도를 바로잡겠다는 취지로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노비라는 것 자체가 호족들의 노동력이면서 군사력이기 때문에 노비안검법으로 면천된 노비만큼 호족의 힘은 약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또한 광종은 과거제를 실시한 왕이었는데, 광종 이전에는 조정 관료를 선발할 때 추천으로 관리를 선발하였습니다. 그렇다보니 호족의 자제들이나 주변인들이 관리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광종은 후주(중국의 나라 중 하나) 출신의 쌍기를 귀화시키고, 그를 관리로 임명하여 당시 후주의 과거제를 본따 고려에도 과거제를 실시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호족들끼리 해먹던 관직을 평등하게 선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이외에도 독자적인 연호 사용(황제국으로 칭함), 관복제도 개편 등 왕권 강화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이러한 제도를 실시 할 수 있었던 건 광종이 무자비하게 숙청하였던 이유도 있습니다. 숙청+제도의 변화로 왕권을 강화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5.0 (1)
응원하기
발렌타이데이, 빼빼로데이 등의 유래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요즘에 14일 기념일이 참 많은데, 기원이 있는 기념일은 발렌타인데이가 가장 유명합니다. 발렌타인데이는 2월 14일로, 기독교의 성인 중 한 명이었던 발렌티누스 사제의 축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원래는 연인들을을 위한 날로, 3세기 경 로마는 황제의 허가 없이는 결혼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기독교 사제인 발렌티누스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몰래 결혼을 시켜주었고, 이게 들통이 나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에 연인의 사랑을 위해 순교한 발렌티누스를 기리며 발렌타인 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연인끼리 서로 꽃이나 초콜렛 등을 주고 받는 날이었으나, 20세기 일본의 제과회사에서 마케팅 목적으로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초콜렛을 주는 날"로 홍보하게 되었고, 이게 우리나라에도 퍼지면서 남자가 여자에게 초콜렛을 주는 날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이외의 유명한 기념일인 화이트 데이, 로즈데이, 빼빼로데이 등은 모두 마케팅 목적으로 나타난 것 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많이 알려진 화이트 데이는 남자->여자로 주는 초콜렛을 여자->남자로 주는 사탕으로 바뀐 마케팅이었고, 빼빼로 데이도 11월 11일인 "1"의 모양이 빼빼로와 비슷하다고 하여 우리나라 제과 업체에서 만든 기념일입니다.
평가
응원하기
나주는 왜 곰탕이 유명한건가요?? 이유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나주곰탕이 유명해진 이유는 나주가 호남지역의 중요 거점이였기 때문입니다.전라도에서 전라는 전주의 "전"자와 나주의 "나"를 합쳐서 전라도라 불리었습니다. 그만큼 나주는 조선시대 중요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호남평야에서 나는 풍족한 농/축산물을 한양으로 옮기기 위한 영산포의 항구 근처에는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고, 수많은 상인들과 일반 백성들이 모이는 도시가 됩니다. 나주는 다른 지역보다 특히 식재료 수급이 수월하였고, 당시 도축업도 많이 발달한 상태라 소고기를 넣고 끓인 곰탕이 많이 유행하게 됩니다. 곰탕 자체가 조선시대에는 상당한 고급 음식이었으나, 발달한 도시인 나주에서는 다른 도시에 비해서는 쉽게 만나볼 수 있는 음식이었습니다."나주곰탕"이라는 지명이 들어간 명칭이 유명해진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로 보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나주에는 커다란 통조림 공장이 위치하고 있었고, 이때 통조림 제조 이후에 남은 잡고기들이 당시 시장 상인들에게 싼 가격으로 유통되었습니다. 이 고기들을 한데 모아 고아 먹는 곰탕 음식점이 자연스럽게 나주에 많이 모이게 되었고, 입소문을 타게 됩니다. 이후 한 식당에서 "나주곰탕"이라는 명칭 자체를 상표로 등록함으로써 나주곰탕이 유명해지게 됩니다.
채택 받은 답변
5.0 (1)
응원하기
선사시대 샤머니즘이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샤머니즘은 "샤먼"이라는 무당을 믿는 것으로, 통구스만주어로 샤먼은 '아는 사람'이라는 입니다. 원시 신앙은 당시 과학의 발전도가 많이 낮았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신이나 귀신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이런 초자연적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 즉 무당이 신이나 영혼의 대리인으로 자리잡은게 샤머니즘이라 볼 수 있습니다. 샤먼은 당시에 환각증상이 있는 약재나 흥분제, 아니면 음악이나 춤과 같은 행위로 신과 교류할 수 있는 사람으로 믿어졌기에, 원시 시대에 샤먼의 역할과 영향력은 족장 수준으로 높았습니다. 일부 원시 사회에서는 지도자와 샤먼이 동일한 제정일치 사회를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평가
응원하기
중국 역사에서 숫자 5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중국에서 숫자 5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용을 뜻하는 숫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사람들이 좋아하는 숫자는 아닙니다. 중국사람들이 좋아하는 숫자는 8과 9로, 8은 부자/ 9 는 장생을 뜻하는 숫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89는 "오래 잘번다"라고 하여 매우 좋아하는 숫자입니다.춘추전국시대에 강력했던 제후들을 춘추 5패와 전국 7웅으로 불렀습니다. 5와 7의 숫자를 좋아하여 했던 건 아니었고, 당시 갈라져 있던 중국 대륙을 통일할 수 있을 정도로 세력이 강했던 제후들의 숫자를 하다보니 춘추 5패와 전국 7웅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5.0 (1)
응원하기
역사 기록의 객관성에 대한 철학적 논쟁은?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대학에서 역사학을 배우면서 가장 처음 배웠던 책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에는 "역사"의 정의에 대하여 깊게 담론하는 내용이 들어있는데, 문의주신 역사는 객관적일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기도 하였습니다. 저자인 E.H.카에 의하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 즉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의 대화"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결국 기록되어야 역사로 볼 수 있기에, 기록하는 역사가의 관점이 무조건적으로 반영될 수 밖에 없다는 것 입니다.역사 서술에서 모든것을 빼고 객관적인 기록만 적어둘 순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가의 관점이나 시대에 대한 통찰 없이 단순 기록으로써는 역사로 보기도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결국 과거를 돌이켜봄으로써 현재를 통찰하고, 더욱 진보하기 위하여 그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객관적인 사실과 현재 역사가의 담론이 합쳐졌을때 비로소 역사의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채택 받은 답변
5.0 (1)
응원하기
부여의 사출도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사출도는 부여의 행정구역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초기 부여는 부족끼리의 연맹 국가였으며, 이때 당시 대표 부족이 4개 부족이 있었습니다. 마가, 우가, 저가, 구가로 불리는 이 4부족이 중심이된 연맹체가 부여였습니다. (마가, 우가, 저가, 구가는 모두 가축 이름입니다.) 이 부족들이 지방에 눌러 앉게 되면서 행정구역화 되었고, 수도를 중심으로 4방향으로 뻗어나간다고 하여 사출도란 이름으로 불리었습니다.
평가
응원하기
태종이 세종의 권력을 위해서 어떻게 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태종은 3남이었던 세종을 세자로 책봉한 후, 자신의 왕권으로 세종의 지지기반을 다질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가장 첫번째로 한 것은 태종이 직접 한 선위 쇼였습니다. 본인의 왕권을 세자인 세종에게 물려준다는 선위 선언을 지속적으로 하였는데, 이를 제대로 반대하지 않는 신하는 자신, 또는 왕권에 대해여 역심을 품고 있다고 해석하여 숙청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자신의 카리스마로 신하들을 견제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이후 실제로 자신의 왕위를 세종에게 양위, 선왕으로 사후까지 4년간 세종의 뒤에서 신하들을 견제하였습니다. 피의 숙청으로 유명했던 태종이 살아있는데, 세종의 왕권에 도전할 신하가 있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채택 받은 답변
평가
응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