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 계기는?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초 이자겸의 난이 발생했을 때 내의(의관)였던 최사전이 인종에게 이자겸이 설치는 이유는 척준경을 믿기 때문이라 하여 척준경을 설득하도록 하였습니다.때마침 이자겸의 난 과정에서 인종 밭밑에 활을 쏘고, 궁궐에 불을 지른 책임 소재를 두고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가 벌어졌습니다.고려사 이자겸 열전에 따르면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의 종놈이 척준경의 종에게 "너의 주인은 죽어 마땅하다"고 말다툼을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들은 척준경이 왜 나한테만 뒤집어 씌우냐며 대노했고, 이자겸이 화해를 시도하나 실패하였습니다.따라서 국왕의 존재를 부정하고, 궁궐을 태운 책임의 소재를 둘러싸고 이자겸과 척준경이 갈라서게 된 것입니다.
Q. 중방과 교정도감의 차이점은?.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 중방은 2군 6위의 상장군 및 대장군이 모여 회의하는 합좌기구입니다. 무신집권기 초반에 중방은 무신 집정들이 국정을 운영할 때 활용되었습니다.그러나 중방이 있었다는 것은 결국 무신집권자 개인이 다른 세력에 견제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의방이 정중부에게, 정중부가 경대승에게, 이의민이 최충헌에게 제거되는 모습은 그들의 권력기반이 상당히 취약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방의 장군들이 이러한 쿠데타를 묵인했기에 정권의 교체가 이뤄졌을 테니까요.반면 교정도감은 무신집권자 개인의 권력이 한층 강화되었음을 보여줍니다.교정도감은 고려 희종 5년인 1209년에 최충헌이 설치한 것으로, 최충헌을 살해하려고 청교역의 역리와 승려들이 모의한 사건이 발각된데서 비롯됩니다.최충헌은 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자 교정도감을 설치하였습니다. 본래 도감은 임시 관청에 붙습니다. 따라서 그 역할이 다하면 사라져야 함에도 교정도감은 무신집권기 끝까지 존속했습니다.즉, 기존에 있던 국가조직이 아닌 별개의 조직을 만들고, 그 기구의 최고직인 교정별감에 취임하여(형식상 왕의 임명을 받지만) 국가의 모든 일을 홀로 좌우한데서 합좌기구인 중방과는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Q. 정치적 사건인 경신환국은 어떠한 사건 이였나요?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경신환국은 조선 숙종 6년인 1680년 경신년에 있었던 사건으로, 집권 세력인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대신 집권하게 되었습니다.당초 이 사건은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이 자신의 할아버지가 시호를 받아 기념잔치를 벌였는데, 마침 비가 내려 국왕의 허락 없이 유악(기름먹인 천막)을 가져다 쓴 데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유악사건은 실록에 나오지 않고, 조선시대 야사집인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사실은 아닌 듯 보입니다.실상 경신환국은 숙종 초기 왕권의 불안정성과 남인의 지나친 독주에 따라 발생한 사건입니다.숙종 초반에는 현종 시기 제2차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하여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숙종의 외가인 청풍 김씨 등도 만만치 않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그 와중에 숙종의 건강이 좋지 않자 유력한 종친들을 중심으로 불순한 움직임이 엿보였습니다. 또한 남인은 군권을 확실히 장악하고자 도체찰사부의 설치를 단행했습니다.이에 서인 측에서 김석주ᆞ김익훈과 같은 훈척 세력들이 남인 허적의 서자 허견이 역모를 일으키려 했다는 고변을 바탕으로 사건을 확대해, 숙종의 왕권을 위협하는 유력한 종친들을 제거하고 남인 대부분을 축출하였습니다. 이것이 경신대출척이라고도 하는 경신환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