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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희주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김희주 전문가입니다.

김희주 전문가
홍익대학교
Q.  조선 태종이 왕권강화를 위해서 한일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희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태종의 왕권강화 정책은 아래와 같습니다.📍6조직계제를 시행하여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했습니다. 📍사간원을 독립시켜 신하간의 비판을 조장해 신권을 낮추고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의금부, 의례상정소를 만들어 왕이 직속으로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유향소를 혁파하고 지방관을 파견하며 수령7사를 확립하는 등 지방통제를 강화하여 중앙집권체를 공고히하였습니다. 📍사병을 혁파해 왕 외에 군사력을 갖출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여러 정치적 숙청을 통해 외척, 종친 세력을 견제 및 억압했습니다.답변이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Q.  조선시대에 첩의 자식은 대우가 달랏나요?
안녕하세요. 김희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네 그렇습니다. 양반가에서 태어난 첩의 자식을 서얼이라고 하는데, 양반이라면 볼 수 있는 과거 시험에서 문과에 응시하지 못했기에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단 무과와 잡과는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무과나 잡과를 통과해 관료가 되더라도 승진에 제한이 있었습니다.답변이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Q.  인조가 청에 쉽게 숙인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희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선 쉽게 숙인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름 남한산성까지 가서도 짧다면 짧은 기간이지만 버티고 또 싸워보려고 했았습니다. 다만 결국 삼전도에서 청과의 군신관계를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물리적으로 청이 너무 강했기 때문입니다. 계속 명과의 의리를 지키려고 버티고 있다가는 청에게 복수는 커녕 나라가 망하게 생겼으니 어쩔 수 없이 청과 군신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답변이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Q.  명나리에서 사신 방문시 누가 응대했나요?
안녕하세요. 김희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을 기준으로 말씀드립니다. 명나라와 청나라 사신은 황제 대신 온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황제와 격이 같았습니다. 따라서 국왕이 명이나 청 황제를 맞이하기위해 친히 행차하여 모화관이라고하는 중국 사신 접대 장소로 갔습니다. 물론 중국 사신이 국경에 들어오거나 하는 과정에서 행정적인 처리를 하거나 응대를 하는 사람은 지방관으로 파견됐던 평안도 감사나 의주 부윤이기는 했습니다만, 궁금해하시는 격이 맞는 응대자는 조선 국왕이었습니다. 심지어 엄밀히 말하자면 청나라의 경우에는 군신관계에 있었기에 청나라 사신이 황제 대리로서 더 우위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례로 조선 국왕은 청나라 사신이 오면 황제에게 인사드리는 예인 삼궤구고두례를 행했습니다.답변이 되었길 바랍니다.
Q.  고구려 백제에서는 불교에 저항이 없었나요?
안녕하세요. 김희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네. 아마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 수용은 매우 순탄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불교는 당시로 치면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외래 문물이자 왕권 강화를 위한 정치적 도구였습니다. 왕즉불 사상이나 호국 불교의 사례에서 보듯 왕은 불교라는 새로운 사상을 통해 토착세력(귀족)들을 누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고구려와 백제는 약 4세기경, 즉 토착세력의 힘이 그렇게 강하지 않을때, 나라가 성장하고 있던 시기에 불교를 수용한 것이기 때문에 토착 신앙을 기반으로 햤던 귀족계층의 저항이 크지 않았던 걸로 보입니다. 반면 신라는 그보다 150년 후인 6세기경 나라도 이미 세워진지 오래고 나름의 기반이 형성되어서 이미 토착세력들이 자리 잡았는데 거기에 새로운 사상을 도입해서 토착세력의 힘을 약화시키려고 하니 반발이 컸던 것입니다.답변이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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