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마녀사냥이 교회와 관련이 있다고 하는데요. 어떻게 관련이 있는건지 그 배경이 궁금합니다.
예전에 교황이 과거 마녀사냥에 대해서 사과를 한적이 있었는데요.
그렇다면 이렇나 마녀사냥과 교회와 어떠한 관련이 있었던건지 그 역사적 배경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마냐사냥은 종교개혁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마녀사냥이 벌어진 주요 원인이 종교개혁(가톨릭의 자체적 쇄신운동 포함)으로 교파화 사회가 도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번 몰아치기 시작한 광풍이 그렇게 쉽게 가라앉을 리 없었다. 결국 근세에 정점을 찍은 뒤 가라앉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중세 시대에 이단심문의 장소는 거의가 남부 프랑스 및 북이탈리아로 한정되었고, 주된 대상은 마녀가 아닌 이단, 특히 알비파였습니다.
마녀는 본래적 의미가 '동네 무당'에 가까운 의미였고, 원칙적으로는 불허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사회의 구석에서 묵인되는 존재였다고 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세기에 들어서면서 기독교 사회권은 악마가 인간이나 동물 등을 이용해 악한 행위를 한다는 믿음이 생겼고 이러한 생각은 기독교 이전부터 민족 신앙에 대한 불신감이나 십자군 병사들에 의해 동방에서 가지고 온 사상 및 문화 등이 융합하여 생긴것으로, 고대 이래 악마가 인간에게 영향을 끼칠수 있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 있어 사람들은 그것을 근절하려고 싸웠고 그 방법 가운데 하나로 악마의 하수인 으로 여겨진 인간에 대한 규탄이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18 세기 마녀사냥이 집중적으로 발생했었습니다. 실제로 이 마녀사냥은 교회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가톨릭 교회와 일부 개신교 교파는 마녀 사냥을 조장하고 영속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교회는 주술을 이단으로 보았고 종교적 정통성과 사회적 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취급했습니다. 실제로 종교 당국은 주술 혐의로 기소된 사람들의 재판과 처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마녀에 대한 소추를 말한다. 넓은 의미의 마녀나 마술사를 재판하는 것은 고대 로마기부터 존재하고, 프랑크 왕국에서도 민중에 의한 마녀추급(追及)이 과도한 것에 대한 금령이 나와 있다. 다수의 다른 사회에서 보이는 이런 현상이 유럽사회에 심각한 사태로 변용하는 것은 13, 14세기의 일이다. 당시 그리스도 교회는 12세기 말 이후 직면한 이단문제에 대해서 제도적 대응을 확립시켰는데, 마녀, 즉 특이 능력을 가진 여성이 행한다고 믿었던 요술 또한, 이단의 교설 또는 행위로 보았다. 이런 중에서 1258년, 1320년, 로마교황은 이단심문의 범위 내에서 마녀소추를 행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교서를 발한다.
15세기에는 종래의 이단이 그림자를 감춘 것에 대해서, 사회적 불안에 유래하는 마녀공포가 표면화되고, 이 사태에 대응해서 1486년, 마녀론의 고전이라고 하는 J. 슈프렝거와 H. 크래머에 의한 『마녀의 망치』가 독일에서 출판되었다. 이 저작은 마녀에 대해서 정의했을 뿐만 아니라, 마녀재판의 방식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종래의 이단심문을 문제에 관해서 상술한 것으로, 체포, 심문, 증인, 판결에 이르는 여러 절차를 설명하는데 그에 의하면, 피의자는 요술을 부리지 않도록 알몸이 되고, 옥에 갇혔다. 재판관은 자백을 강요하고, 그에 따르지 않는 경우에는 망으로 묶어서 고문을 가하였다. 『마녀의 망치』 후, 활판인쇄술의 발명에 의한 출판혁명도 관계해서 16, 17세기에는 수많은 마녀론이나 악마학의 저작이 쓰여졌다. 그 대표작으로서 J. 보단 『마술사의 악마광』(1580), N. 레미 『악마예배』(1595), 스코틀랜드왕 제임스 6세 『악마학』(1597), H. 보게 『마녀론』(1602) 등을 들 수 있다. 재판관은 이들 교설에 비추어서 피의자를 심문했다. 마녀집회, 악마와의 성교, 주술 등은 이 사이에 만들어진 마녀상이다.
16세기에는 종교개혁을 둘러싼 대립이 심각화 된 점도 있어서 마녀에 대한 흉악한 소추가 급증했다. 영국에는 M. 홉킨스 같은 <마녀 발견>을 직업으로 하는 인물도 나타났다. 그는 널리 잉글랜드의 각지를 돌아다녀서 300명에 이르는 마녀를 고발ㆍ처형했다고 한다. 사회적 소인에 의한 집단 히스테리의 희생자로서 피고석에 끌려온 여성은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이나 풍설에 의한 증언, 재판관에 의한 유도신문에 의해서 이단재판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는데 알몸으로 손을 뒤로 묶은 후 물 속에 넣어서, 떠오르면 유죄로 한다는 신명(神明)재판(신재)의 일종도 잘 알려져 있다. 한편 마녀의 죄는 화형에 처해졌으며, 사실 많은 여성이 희생되었다. 마녀재판의 기록은 다수 남아 있으며, 이 시대에 유럽사회가 빠진 도망칠 수 없는 비참한 상황을 확실히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점차로 밀고의 공포에 떨고, 타인에게 무고의 죄를 덮어씌우려고 하였다. 마녀의 혐의 자체는 원죄라고 하여도, 보통사람과는 다른 능력을 가진 여성이 존재한 것은 확실하며, 그런 여성이 사회적인 공희의 제단에 올려진 경위를 상세하게 분석한다는 과제가 현재의 역사학에는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최근의 새로운 마녀, 마녀재판연구의 고양은 그런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18세기의 도래와 계몽 이성의 대두에 의해서, 마녀재판은 금지의 대상이 되어서 소멸했다. 기본적으로 마녀재판은 13세기 경부터 17세기에 걸쳐서 유럽세계가 근대를 맞이하는 과정에서 체험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사회적 공희를 구하는 <마녀사냥>이나 마녀재판은 형태를 바꾸어서 가끔 현대세계에도 출현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출처 : 종교학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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