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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호저172
까칠한호저17223.06.02

역사적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이 개입한 대표적 사건은 어떤 것이 있나요?

로스차일드 가문은 가장 돈이 많은 가문하면 나오고 있으며 정확한 재산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역사적으로 일반적인 가문이 동원하기 힘든 돈을 쓰곤 했습니다. 그 예로 러일전쟁에 돈을 대기도 했다던데 그 외에 대표적인 사건은 무엇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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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02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로스차일드 가의 기원

    로스차일드 가는 신성로마제국의 자유도시 프랑크푸르트의 게토(ghetto ; 유대인 거주구역)에서 대대로 상업에 종사하던 유대인 가문이었다. 18세기까지는 소규모 상인가문에 지나지 않았으나 마이어 암셸 로트실트 대에 이르러 헤센 선제후국의 재정관리를 맡으며 성장했다. 그리고 그의 다섯 아들 암셸 마이어 폰 로트실트, 잘로몬 마이어 폰 로트실트, 나탄 마이어 폰 로트실트, 카를 마이어 폰 로트실트, 야콥 마이어 폰 로트실트의 대에 와서는 각각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오스트리아의 빈·영국의 런던·양시칠리아 왕국의 나폴리·프랑스의 파리에 은행을 설립해 유럽 전역으로 사업을 확대하면서 유럽 각국의 정치와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금융재벌이 되었다.

    로스차일드라는 명칭은 그들이 붉은 문패(roten schild)가 달린 집에서 살았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은 법적으로 가문의 명칭을 지닐 수 없었으므로 로스차일드 가도 시대에 따라 ‘바우어(Bauer)’나 ‘한(Hahn)’ 등을 성처럼 사용해왔다. 하지만 1806년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유대인에 대한 법적인 차별이 완화되면서 로스차일드를 공식적인 가문의 명칭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소규모로 환전상을 하던 마이어 암셸 로트실트는 헤센 선제후국의 통치자인 빌헬름 9세의 신임을 얻으면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1789년 빌헬름 9세에게 정식으로 대부업을 승인받은 로스차일드 가는 1792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전쟁과 1803년에 시작된 나폴레옹 전쟁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구축한 정보망과 유통망을 배경으로 나폴레옹의 베를린칙령 이후 가격이 폭등한 영국의 면제품 등을 몰래 들여와 팔면서 큰 이익을 얻었다. 그리고 런던과 파리에 엔엠로스차일드앤선즈(N. M. Rothschild & Sons) 은행과 로쉴드 은행(Banque Rothschild)을 각각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금융업으로 진출해 상업어음의 발행과 대부업으로 큰 수익을 거두었다. 나폴레옹 전쟁 때에는 영국 정부를 도와 동맹국들에 보내는 자금 운송과 대부 사업 등을 벌였으며, 영국 전시공채를 대량으로 매입해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한 뒤 큰 차익을 남기기도 했다. 프랑스에 다시 왕정이 들어선 뒤에는 국내로 돌아온 귀족들의 재산 관리를 맡아 투자 사업을 벌이며 부를 쌓았다.

    빈체제가 성립한 뒤에는 유럽의 여러 국가들과 왕가들의 공채(公債) 발행과 재산 관리를 맡으면서 유럽 전역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1818년 프랑스가 동맹국들에게 치를 전쟁 배상금을 놓고 열린 엑스라샤펠 회의(Congress of Aix-la-Chapelle)를 계기로 로스차일드 가는 공채 발행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재상이던 클레멘스 메테르니히와의 긴밀한 관계를 배경으로 유럽 주요 국가들의 공채 공모와 채권 발행을 맡으면서 막대한 수익을 거두었다. 1822년에는 마이어의 다섯 아들 모두가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황제인 프란츠 2세에게 남작의 작위를 받기도 했다.

    로스차일드 가의 성장

    마이어 암셸 로트실트가 죽고 그의 다섯 아들들은 각각 프랑크푸르트·빈·런던·나폴리·파리에 은행을 설립해 공채 발행과 자금 대부 등으로 각국 정부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이어는 죽기 전에 형제들 간의 협력을 강조하면서 일족 안에서의 혼인과 중요 직책의 계승을 유언으로 남겼다. 유럽의 주요 국가들에 자리 잡은 로스차일드 가의 다섯 분가(分家)는 친족 내의 혼인으로 서로의 결속을 다졌으며, 일가의 독자적인 연락망을 구축해 다른 경쟁자들보다 우수한 정보력을 지닐 수 있었다.

    19세기에 로스차일드 가는 철도산업에 대한 투자로 큰 수익을 거두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본가를 맡은 장남 암셸은 바이에른 동부철도와 라인강 철도 등을 개설했으며, 오스트리아 빈의 둘째 잘로몬은 오스트리아 북부철도를 비롯해 중부유럽의 철도망을 잇달아 개설했다. 프랑스 파리의 막내 야콥은 1837년 파리-생제르망 철도를 시작으로, 1846년에는 프랑스 북부철도를 개설했다. 이처럼 로스차일드 가는 유럽의 주요 철도망을 지배하면서 유럽의 산업화 과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밖에 수에즈 운하, 이집트 철도의 개설 등과 같은 각국의 투자 사업에 자금을 조달하고, 직접 해운회사와 철강회사 등에 투자해 운영하기도 했다.

    로스차일드 가는 전시 공채의 발행으로 전쟁이나 식민지 침탈에 필요한 자금을 유럽 각국에 제공하기도 했다. 그들은 유대인을 박해하던 러시아 제국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 1853년 크림 전쟁 때에는 러시아에 맞선 영국, 프랑스, 투르크 등의 연합국에 자금을 지원했다. 1904년 러일전쟁 때에도 일본의 전시공채 발행을 맡았다. 그러나 1883년에는 러시아 정부에 공채를 발행해주면서 그 대가로 카스피해 연안 바쿠유전의 채굴권을 얻어냈다. 이곳에서 로스차일드 가는 노벨 형제와 협력해 석유를 채굴한 뒤 유조선을 개발해 그것을 유럽 각지로 운송해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다. 로스차일드 가는 미국 록펠러 가의 스탠더스오일(Standard Oil Company)과 경쟁하기 위해 1914년에는 바쿠유전의 채굴권을 로열더치쉘(Royal Dutch Shell)에 매각하고 그 회사의 대주주가 되었는데, 그 때문에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외국자산이 몰수되었을 때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로스차일드 가 [Rothschild family]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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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스차일드 가문은 18세기와 19세기에 전 세계의 금융과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가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특히 투자 및 대출을 통해 많은 역사적 사건에 개입했습니다. 다음은 그 중 일부입니다.

    1. 나폴레옹 전쟁과 워터루 전투: 로스차일드 가문은 1800년대 초반 나폴레옹의 전쟁 기금을 조달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 후 1815년에 벌어진 워터루 전투에서는 브리티시 군대를 지원했고, 나폴레옹의 패배 후에는 전쟁에서 파괴된 유럽의 재건에 투자했습니다. 워터루 전투 후에 로스차일드가 브리티시 정부로부터 이 정보를 빨리 얻어 이를 이용해 런던 증권시장에서 큰 이익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 러일전쟁(1854-1856):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 전쟁에서 영국 정부에 대출을 제공하여 영국의 전쟁 기금을 지원했습니다.

    3. 수에즈 운하 건설: 1850년대에 이집트 수에즈 운하의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데 로스차일드 가문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를 통해 운하 건설이 가능해져 서유럽과 아시아 간의 무역이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은 많은 사건에 개입했지만, 그들의 역사와 영향력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특히 이 가문은 종종 음모 이론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이로 인해 그들의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역사를 연구할 때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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