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의 역사와 종류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재즈가 흑인음악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왜 생긴건지에 대해모릅니다
재즈의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와 그 원인 그리고 종류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큰틀로 말씀드리자면 재즈는
미국 뉴올리언즈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흑인들이 자기 자신 만의
리듬을 가지고 그것을 표현함으로써
퍼져 나가 지금은 다양한 재즈로 많이 발전이 되었습니다.
재즈의 종류는 너무 많아서
일 일이 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새로운 재즈가 생겨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RAGTIME
재즈가 미국에서 시작되었고 그 시초가 레그타임이라는 사실에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설적인 피아노 연주로 유명한 스코트 조플린은 당대에 가장 인기있는 작곡가이자 연주가였으며 만약 당신이 그당시 녹음한 음반을 갖고있다면 조플린이 얼마나 많은 '넘버1' 히트곡을 발표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레그타임이 화려하게 인기를 모으기 시작하자 이들 작곡가들은 피아노롤 속에 그들의 작품을 새겨넣게 되었고, 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급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기의 전환, 그곳에서 레그타임이 탄생했던 것입니다.
뉴올리언즈와 딕시랜드
초기 뉴올리언즈 밴드는 듣는 이를 트럼펫과 트럼본 그리고 클라리넷 소리로 끌어들이는 것이 마치 고적대와 유사한 느낌을 줍니다. '뉴 올리언즈 사운드'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로는 시드니 버셋, 젤리롤 모튼, 키드 오리 등이 있는데 루이 암스트롱이라는 젊은 트럼펫주자가 처음으로 활약한 곳이 바로 키드 오리밴드였습니다. 이 새로운 재즈는 주로 뉴올리언즈 스트로빌, 그러니까, 말하자면 심야생활과 관련된 장소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1917년 시위원들이 스트로빌을 폐쇄 하자 재즈 뮤지션들은 미국 전지역의 수많은 재즈 클럽으로 흩어져야만 했는데 이로 인해 재즈는 전국적인 현상으로 확산될 준비를 갖추게 된 셈입니다
시카고
뉴 올리언즈의 가장 인기였던 연주자들은 대부분 미시시피를 거슬러 올라가 시카고로 이주했습니다. 킹 올리버와 루이 암스트롱은 그 곳에서 새로운 밴드 를 결성했는데 '블루스'가 처음으로 재즈의 일부로 편입된 것과 오늘날 재즈의 본질로 대표되는 색소폰이 인기를 끌 게 된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습 니다. 밴드 리더는 스타가 되었고, 소위 '시카고 스타일'이라 불리운 이음악 은 독주 또는 재즈에서 말하는 코러스( 연주자가 오리지널 멜로디의 코드를 변형시켜 즉흥 솔로를 연주할 때 )멜로디 보다 더욱 강조하게 됩니다. 빅스 바이더멕과 플레쳐 헨더슨은 이 스타일을 대표하는 또다른 위대한 연주가였습니다.
캔사스시티
소위 '리프(Rif) 스타일' 또는 '콜 앤드 리스펀스(Call & Response)'라 불리우는 새로운 핫 사운드가 30 년대 캔사스 시티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이 사운드는 한 악절을 반복하여 연주했으며 독주자들이 연주할 때는 '부르고, 대답하는'형태를 취했던 것입니다. 카운트 베이시는 이러한 공식으로 이 스타일을 이끌었 으며 빅 밴드의 전성기를 열게 됩니다. 아울러 베이시 밴드의 성의없는 듯한 '레이드 백(Laid Back)'사운드는 바로 그들의 정밀성과 꼼꼼함을 알려 주는 부분 입니다. 찰리 크리스찬은 그 당시 재즈 밴드에 기타를 도입시킨 인물인데 베이시 밴드에서 연주하면서 기타의 테크닉과 하모니, 멜로디 등을 새로운 경지로 끌어 올렸으며 레스터 영과 헤리 스위치 에디슨과 같은 출중한 솔리스트들이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것 도 이 카운트베이시 악단을 통해서였습니다.
SWING
[스윙재즈의 음악적 특징 ]
대표적인 음악가로는 베니 굿맨(Benny Goodman, 클라리넷),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 피아노),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 피아노), 엘라 핏츠제랄드(Ella Fitz gerald, 보컬), 빌리 홀리데이(Billy Holyday, 보컬), 해리 제임스(Harry James, 트 럼펫), 로이 엘드리지(Roy Eldrideg, 트럼펫), 콜멘 호킨스(Coleman Hawkins, 색소폰), 레스터 영(Lester Young, 색소폰), 글렌 밀러(Gienn Miller, 트럼본), 테디 윌 슨(Teddy Wilson, 피아노), 아트 테이텀(Art Tatum, 피아노), 진 쿠르파(Gene Krupa, 드럼)등을 들 수 있고, 시기는 대략 1930년에서 1945년 사이로 본다.
스윙재즈는 율동감이 생생히 살아있으며, Big Band중심으로 화려하지만 재즈 본래의 특색이 매우 제약받은 상태의 재즈이다. 즉, 밴드 인원이 많았으므로 전체가 행하는 즉흥연주는 편곡으로 대체해 미리 연습하였고, 즉흥연주는 솔로주 자나 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위법적으로 멜로디에 충실하여 즉흥연주를 하던 것이 화성적으로 맞추어 진행하는데 역점을 두었다.결론적으로 스윙재즈는 유럽 적인 냄새가 짙은 재즈라고 말할 수 있다.
[스윙재즈의 발생 및 발전]
스윙(Swing)이란 단어는 "흔들리다, 흔들거리다"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 그대로, 스윙재즈는 율동감을 음감에 담아내고 있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스윙재즈의 음악적인 요소들은 시카고 시대부터 있었던 것들이지만, 스윙 시대에 들어와서 더 욱 확대되고 발전되어 완성되었다. 스윙감을 주는 제일 큰 요소는 박자에서 온다고 볼 수 있는데, 기존의 2박자에 서 4박자 재즈로 발전된 점이다. 4박자는 보통 때 박자를 세는 식으로 "원, 투, 트리, 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원 & 투 & 트리 & 포 &"이라고 하면서 "그리고(And)"에 악센트를 탄력있게 줌으로써 강한 율동감을 불러 일으킨다. 이런 박자를 "Off Beat"라고 부르며, 스윙 시대에 있어서 재즈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스윙 재즈가 나타난 시기는 1920년대 말 즈음부터였다. 세계 경제공황이 1929년에 일어났으므로, 이 당시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때라고 할 것이다. 때문에 그러한 스윙 재즈는 상대적으로 사회 분위기에 파뭍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해고를 당한 재즈 음악가들은 큰 밴드(Big Band)에 흡수되는 경향을 보이고, 밴드가 커짐에 따라 즉흥연주의 영역이 점점 줄어들어 즉흥연주보다는 바리에이션 형태로 연주하게 된다. 스윙 오케스트라에는 흔히 백인과 흑인이 함 께 섞여서 연주하는 모습이 보였으며, 이들은 음악교육을 받은 사람들로써 악보 를 볼 수 있었으므로 미리 정확하게 편곡을 하여 연주하였다. 경제적인 이유 및 그 당시 유행하던 댄스음악 계통인 "스위트 뮤직 (Sweet Musi c)"으로 인하여 계속 빛을 보지 못하고 있던 스윙재즈는, 드디어 백인 클라리넷 주자인 베니 굿맨(Benny Goodman)이 로스엔젤레스의 팔로마 볼룸에서 성공을 거둔 것을 계기로 하여(1935년) 본격적인 스윙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어서 그 가 1983년 1월에는 클레식만을 공연해 오던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연주회를 열어 성공을 거둠으로써 재즈가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며, 이후 위상에도 큰 공헌을 하게 된다.
BEBOP
1940년대 BEBOP의 탄생은 모던 재즈의 시작으로 종종 인식되곤 한다. 비밥 스타일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높은 테크닉을 강조하고, 단순한 멜로디보다는 좀 더 복잡한 멜로디를 추구하던 그룹들로 부터 생겨났다. 이런 비밥의 혁명으로부터 뻗어나온 줄기들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있었다. 알토 섹스폰 주자인 찰리 버드 파커는 이러한 운동의 아버지였으며 트럼펫의 디지 길레스피는 그 초창기의 협력자였다. 디지는 동시에 빅밴드를 이끌고 있기도 했는데, 그는 쿠바 퍼쿠션 주자들과의 작업을 통해서 맘보와 같은 아프로-쿠반 뮤직을 미국의 청중들에게 소개하려 하였다. 그러나 비밥과 모던 재즈의 기초를 다진 것은 디지와 파커의 특색을 따른 퀸텟이나 다른 작은 그룹들이었다. 아직도 이전의 스타일이 사용되고, 블루스와 조지 거쉰이나 콜 포터 등의인기곡들이 많이 사용되던 때였지만 비밥 작곡가들은 점점 대중적인 곡들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춤곡의 경향을 더이상 나타내지 않게 되었다. 비밥의 곡들은 빠른 템포와 8th NOTE의 난해한 진행으로 특성 지어 진다. 많은 비밥 스탠다드 곡들은 "I GOT RHYTHM", "CHEROKEE", 또는 "HOW HIGH THE MOON"과 같은 다른 곡들의 코드 진행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즉흥 연주는 그 코드진행에 영향을 받은 스케일에 기초를 두고 있었으며 그 스케일들은 5도 FLAT과 같은 변주를 종종 포함하기도 하였다.
비밥의 탄생은 솔로 뿐만 아니라 합주에 있어서도 새로운 접근을 이끌어 내었다. 드러머들은 베이스 드럼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지기 시작했으며 심벌과 HI-HAT의 비중이 점점 높아졌다. 베이스 연주자들은 코드 진행의윤곽을 만들어 나가면서 대부분 QUATER NOTE로 이루어진 배타적인 WALKING BASS LINE을 연주 하면서 곡의 생명을 불어넣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좀 더 가벼운 터치의 피아노 연주가 가능해졌으며 피아니스트들은 더 이상 왼손으로 곡의 비트나 코드의 근음을 연주하도록 강요받지 않게 되었다. 덧붙여 말한다면 모던 재즈는 이제 일반적인 원칙이 되었다.
연주자들은 대부분 합주로 멜로디를 연주하고 그 멜로디의 코드에 입각한 솔로를 행한 후에 다시 첫부분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연주자들이 서로, 또는 드러머와 같이 네개의 소절씩을 주고 받으면서 연주하는 형식은 상식적인 일이 되었다. 표준이랄 수 있는 재즈 QUARTET(피아노, 드럼, 베이스, 섹스폰 또는 트럼펫)과 QUINTET의 조직은 비밥에 적용된 40년대 이래로 거의 변하지 않고 있다. 이전 세대의 많은 연주자들이 비밥이 가는 길을 열어주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들은 바로 LESTER YOUNG, COLEMAN HAWKINS, ROY ELDRIDGE, CHARLIE CHRISTIAN, JIMMY BLANTON, 그리고 JO JONES 등이었다. 이들 가운데서도 YOUNG과 HAWKINS는 이러한 영향을 준 가장 중요한 인물로 손꼽힌다. 이들 외에 비밥의 주요 인물로는 섹스폰의 SONNY STITT, LUCKY TOMPSON, 트럼펫의 FAT NAVARRO, KENNY DORHAM, MILES DAVIS, 피아니스트 BUD POWELL, DUKE JORDAN, AL HAIG, THELONIOUS MONK, 비브라폰의 MILT JACKSON, 베이시스트 OSCAR PETTIFORD, TOMMY PORTER, CHARLES MINGUS, 그리고 드럼의 MAX ROACH, KENNY CLARKE, ROY HAYNES등이 있다. 특히 MILES, MONK, MINGUS등은 POST-BEBOP 시대 또한 이끌어 나간 인물들이었다.
하드 밥과 보사노바(1960년대)
60년대 재즈는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 주된 이유는 록 음악의 대단한 인기와 엘비스, 처비 첵커, 그리고 비치 보이스 레코드의 선풍적인 히트때문 었습니다. 그러므로 디트로이트, 필라델피아, 뉴욕을 중심으로 재즈 뮤지션의 신세대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들은 재즈의 근원에 더욱 접근하였으며연주 상에 있어서 기교적인 완벽성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 시기는 테너 색소폰주자 소니 롤린스와 존 콜트레인, 트럼펫주자 리 모건, 그리고 드러머 맥스 로치와 같은 뮤지션들에 의해주도되었 는데 이들의 음악인 하드 밥은 다양한 음악과 결합하여 다이나믹하고 격렬하며 정성된스타일 의 재즈를 탄생시킵니다. 아울러 같은 시기에 브라질 음악은 재즈로부터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 보사노바는 위대한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이 물결의 중심에는 역시 섹소폰 니스트 스탄 게츠와 그밖에 많은 60년대 재즈 뮤지션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들의 자유스럽고 편안한 즉흥연주는 이전에 결코 들을 수 없는 매력으로 가득차 있던 것입니다.
COOL
재즈는 몇번의 변천속에 오늘 날에 이르렀는데 그 줄기를 크게 보면, 뉴올리안즈 재즈- 빅밴드&스윙-밥(Bop)&쿨(Cool)-프리재즈- 퓨전으로 나눌 수가 있을 것이다. 밥과 쿨은 서로 양분할만한 성질은 아니다. 다음에 그 이유가 있다. 서늘하다는 의미의 쿨은 대충 생각해봐도 핫(Hot) 뮤직의 반대로 나온 것일텐데 일반적으로 핫 뮤직 하면 떠오르는 것이 스윙 아니면 밥일것이다. 핫뮤직의 일반적인 특성은 큰 음량, 심한 비브라토, 많은 음표에 의한 감정 과다등을 들수가 있으며 쿨은 이와 반대로 작은 음량, 가녀린 비브라토,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음표의 음악이다. 그 외에 여러 비교가 있을 수 있겠으나 외적으로 보여지는 비교사항으로는 이 3가지가 가장 크다. 그렇다면 밥과 쿨은 확연히 구분 되어지 는 스타일인데도 그것을 양분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밥 스타일이 유행한 다음 전격적으로 쿨 뮤직이 등장한 것이 아니고 서로의 영향 아래 꼬여 있던 것이 시대가 지나면서 서서히 풀렸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 다. 루이 암스트롱-콜맨 호킨스-찰리파커&디지 길레스피로 이어지는 이른바 뜨거운(Hot) 음악이 인기일때 레스터영-프레디웹스터-마일즈 데이비스로 이어지는 차가운(Cool)음악은 표면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존재 했기 때문이다. 쿨은 때때로 지나치게 많은 음표와 과장 된 표현에 질린 뮤지션들이 앞으로 내세운 스타일로 밥의 논리적인 발 전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쿨뮤직은 그 외적 특성 때문에 스윗(Sweet) 뮤직과 동일시 이해되는 경우도 있다. 사실 둘은 얼핏 보기에 비슷하다. 특히 음량, 음색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스윙 뮤직은 단순히 한번에 들어서 얼핏 좋게 들리기 위한 모든 수단으로 진부한 화성과 진부한 솔로틀에 박힌 연상기법을 사용한다. 달 하면 빛이 어슴푸레한 초승달 아래 그대와 뽕밭에서 영원히 사랑을 속삭인다는 식의 연상. 스윗 뮤직의 음색은 차다라는 의미보다는 닭살 돋을 정도로 부드럽다는 의미로 해석 해야 한다.이러한 오해는 쿨 뮤직의 매우 뛰어난 특성 한가지를 이야기 하지 않아서 인데, 음의 절묘한 배치와 제어가 그것이다. 이것에 의해 단순한 주제라 할지라도 음악은 다양성과 탄탄한 구성을 가지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더 설명하기로 한다.
쿨이라는 말을 누가 제일 처음 사용했는가는 알 수가 없다. 앨범 명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마일즈 데이비스의 "Birth of the cool"이 최초겠지만 이 또한 자신이 붙인 명칭도 아니고 보면, 쿨이란 말은 세종 대왕이 한글을 창제하듯 한 것이라기 보다는 쿨 사운드에 의견을 같이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용어라는 추측을 할 수가 있 으며, 쿨 이라는 용어 또한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현대 미국인들은 Good이 들어갈 자리에 Cool이라는 말을 종종 쓰곤 하는데 이 또한 쿨 재즈의 영향은 아닐는지. 실제로 쿨 뮤지션들은 Good대신에 Cool이란 표현을 쓰기도 했다고 어느 책에서 본 기억이 있다.
그러면 쿨 사운드의 본질을 간단하게 설명하기 위해 마일즈 데이비스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쿨의 모든 사고 방식은 마일즈 데이비스 한사람에게 집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마일즈는 쿨에만 국한시킬 수 있는 인물 또한 아니다. 아뭏든 그의 가장 큰 공헌이라고 하면 레스터영으로 부터 시작된 프레이즈 (그것은 당시의 일류 색소폰 주자 콜맨 호킨스와는 확실히 구분되는, 대단히 불균형인 듯한 프레이즈다) 를 한층 발전시켜 철저히 계산되고 심사숙고 한 음악을 만든 데에 있다.
마일즈는 한때 찰리파커 캄보에 소속되어 있었던 만큼 밥에 익숙해 있었지만, 테크닉 면에서는 그렇게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 는 그는 일류급 연주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자기 억제력은 음악 곳곳에서 뛰어난 효과를 발휘 하는데, 이런 효과들을 한 군데로 통일하여 음악을 구성하는 능력은 대단하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사운드에 대해 사람들이 쿨이라는 말을 쓴 것이 아닐까 한다. 게다가 마일즈는 자신의 음악을 일련의 뛰어난 밥 연주자들과 함께 만들었다. 이 또한 모순으로 들리지만 마일즈의 편에서는 모순이 아니다.
쿨 사운드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레니 트리스타노와 리 코니츠, 데이브 브루벡, 아트 페퍼, 스턴 켄턴, 모던 재즈 쿼텟 등 등... 그러나 쿨 뮤직중에는 앞서 말한 스윗 뮤직과 구분이 확실치 않은 판도 있다. 분명히 재즈라고 했는데 들어보면 테크닉 경연대회라도 되는 것인 양 연주하는 음악들이 있다. 그러므로 앨범을 구입하고자 할 때에도 조심 스러움이 요구된다.
FREE
'프리재즈'란 용어는 1960년대 전위재즈(avant-garde jazz)들, 특히 오넷 콜맨, 세실 테일러, 앨버트 아일러, 후기 콜트레인 같은 이들의 작품들에 처음으로 붙혀졌다. 이 이름은 콜맨의 음반 '프리재즈'(1960)에서 따온 것이다. 이 음반에서는 자유형식의 즉흥연주가 확장되어 나타나는데, 다시 말해 피아노가 없는 두 개의 4중주단이 함께 연주하였다. (옮긴이 주: 여기서 '자유형식'(free-form)이란, 전통에 얽매이지 않은 새로운 형식의 연주를 말합니다. 이전에는 4중주라면 화음을 넣는 피아노가 꼭 들어가기 마련이었는데 콜맨은 이런 전통을 깬 것이죠. ) 이 연주는 이후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곳에서 재즈의 선구자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한 편 이들 음악을 "전위"(avant-garde), "새로운 것"(the New Thing) 따위 로 부르기도 했는데, 이런 말들은 이 음악이 메인스트림 재즈흐름과 거리를 두고 있음을 강조해 주고 있다. 또 다른 이름으로 "행동 재즈"(action jazz)가 있는데 이것은 재즈 비평가 돈 헥크만이 제시한 것이다. 헥크만은 새로운 음악의 본바탕되는 특성을 이 음악이 지닌 에너지로 여겼던 것이다. 한편 유럽(특히 영국)에선 프리재즈가 그저 '즉흥연주된 음악'을 뜻했다. '프리재즈'는 아주 넓은 영역에 걸쳐있는 여러가지 형식의 음악들을 각각 가리키고 이들을 어우르는 일종의 집합용어라고 할 수 있다. 이 음악을 가장 잘 규정하려면 여러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여기는 특징들을 살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물론 이들 특성으로만 연주를 파악하려고 해서는 안되지만 말이다. 그 특징이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조성(tonality)이 없다', '미리 결정한 코드진행이 없다', '재즈만의 화음구조를 버렸다', '미리 규정한 신호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느슨한 구상속에서 집단 즉흥연주를 펼친다', '이른바 "쿨"(cool)한 음빛깔을 지닌 악기를 피하고, "사람 목소리 같은" 소리를 더 좋아한다', '표준으로 여겨온 박자맞추기(time-keeping)의 유형들을 그만두고 자유롭게 루바토를 따랐다'(옮긴이 주 :'루바토'는 연주하는 사람 내키는대로 음길이나 빠르기를 바꾸는 것을 가리킵니다. ) 이 음악에서 새로운 빛깔들은 대개 다음 두가지 방식으로 얻으려 하였다.
첫째, 전통 재즈악기의 소리를 뒤틀어 내었다. 이 방법은 존 길모어 (옮긴이 주 : 선 라 아케스트라의 단원으로 주로 활동 )와 파라오 샌더스가 즐겨 썼는데, 이들은 색소폰으로 '날카로운 비명 소리'(shrieking)를 내는 연주양식을 끌어 들였다.
둘째, 낯설거나 새로 고안한 악기들을 끌어 들이는 것이다.이런 일은 아트 앙상블 오브 시카고의 구성원들이 많이 했다. 그러나 이 때 전자악기를 쓰는 것, 소리를 전자장치로 조작하는 것과 같은 일은 대개 피하였다. 프리재즈 드럼연주자들은 이른바 "다방향"(multidirectional) 리듬이라는 것을 탐구해 나갔는데, 이는 동시에 여러가지 박자를 진행해 나가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일정한 박동만을 매기는 일에서 벗어나, 타악기 소리에 색깔과 질감을 더함으로써 다른 연주자와 서로 활발히 주고 받는 연주를 해 나갔다. 연주의 형식은 종종 연주자가 지닌 힘이 얼마나 버티어 내는지에 따라 결정되었는데, 즉 그들의 에너지가 사그라들 때가 되어서야 연주곡이 끝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또 선율(멜로디)은 훨씬 더 많이 변형이 되었고, 파편처럼 흩어졌다. 지속음을 연주할 때는 템버린을 흔드는 것처럼 또는 돌풍이 빠르게 변화하는 것처럼 소리를 움직여 내었다. 많은 연주자들은 선율보다는 곡 전체의 질감을 만들어 내는 데에 집중했다. 한편 어떤 이들은 연주하면서 속마음 사이의 "대화"를 창조해 내기도 하고, 서로 다른 음역속에서 한 사람이 부르면 다른 이는 여기에 반응하는 (call-and-response) 식의 연주를 하기도 했다. 또한 연주자들은 어떤 순간에서도 독주 연주를 할 수 있어야 했다. 강조점은 무엇보다도 집단 즉흥연주에 두었다. 어떤 그룹들은 연주에 연극의 요소를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선 라 아케스트라가 보여준 천진난만한 이국적 분위기나 아트 앙상블 오브 시카고나 칼라 블레이가 재치있게 본뜬 짤막한 풍자극을 연주에 끼어넣은 것은 그 좋은 보기이다.(옮긴이 주 : 칼라 블레이의 음반 'Escalator over the hill'(1968-71)을 들어보세요.)
밥(bop)이란 양식이 지닌 특징들을 대부분 치워버림으로써, 여러가지 점에서 1960년대 프리재즈 연주자들은 재즈의 더 단순한 형태들로, 그리고 더 이전의 음악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음악에서는 아프리카 음악에서 끌어온 요소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또 이런 움직임은 민족재즈음악(jazz of ethnic musics)이라는 색다른 흐름을 터뜨렸다. 보기를 들면 돈 체리의 "세계 음악" (world music), 에드 블랙웰이 개척한 서부 아프리카의 "말하는 드럼"(talking drums) 연주법, 레온 토마스가 끌어들인 피그미족의 요델 기술 같은 것이 있다. 또한 로스웰 로드와 스티브 레이시 같은 몇 몇 프리재즈 음악인들은 완전히 밥(bop)을 에돌아 지나가서, 뉴올리안즈 재즈에서 곧바로 전위재즈로 들어가기도 했다. 또 앨버트 아일러 같은 이는 가스펠과 포크음악의 전통을 바탕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한편 이러한 프리재즈 음악양식들은 미국에서 일어난 흑인 지위 향상 운동(Black Power movement)과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 이유로는 운동에 직접 참여하고 옹호한 (이를테면 아치 셰프나 르로이 존스) 연주자들이 지녔던 급진정치적 관점 때문이기도 했고, 이들 음악 자체가 지닌 폭발성과 표현주의다운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프리재즈는 비평가들에게서는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미국의 상업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형태의 음악으로 자신을 세우지는 못했다. (콜트레인은 아주 성공하기는 했지만). 이러한 상황은 예술가들이 발전을 꾀하며 세운 집단의 수가 꽤 되었다는 사실((보기를 들면, 시카고의 the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reative Musicians (AACM), 세인트 루이스의 the Black Artists Group (BAG), 뉴욕의 the Jazz Composer's Orchestra Association (JCOA) ( 옮긴이 주 : AACM에는 아트 앙상블 오브 시카고, 앤소니 브랙스턴, 레오 스미스 같은 이들, BAG에는 줄리우스 헴필, 올리버 레이크, 헤미엇 브루이엣 같은 이들, JCOA에는 칼라 블레이, 마이클 맨틀러, 돈 체리 같은 이들이 속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집단을 대표하는 많은 사람들이 유럽에서 한동안 머물러 지냈던 사실을 설명해준다. 한편 유럽대륙에선 (특히 서독) 프리재즈를 가르치는 토착화된 학교가 자라나기 시작한다. 서독에선 이런 학교의 성장이 베른트 알로이스 침머만 같은 작곡가의 우연예술음악(aleatory art music)이 발전해온 것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시기에 등장한 유럽의 뛰어난 프리재즈 음악인들로는 독일사람인 알베르트 만겔스도르프, 요아킴 퀸, 만프레드 슈프, 알렉스 쉴립펜바흐 (Globe Unity Orchestra를 세우고 이끌었다), 또 영국사람인 존 서만, 데렉 베일리 같은 이들이 있다. 1960년대 기간동안 많은 프리재즈 연주들이 뉴욕의 창고나 다락방에서 열렸다. (옮긴이 주 : 이런 것을 가리켜 아예 "창고재즈" (loft jazz)라고 부르더군요. 1970년 중반에 상업주의를 거부하고 뉴욕의 창고같은 곳에서 연주한 프리재즈의 양식을 가리키는 말이라는군요. ) 또 1972년과 1977년 사이엔 창고재즈 연주축제가 해마다 열렸다. 그런데 창고재즈는 본래 상업성과는 거리가 멀고,또한 이들 연주가 끌어모으는 청중들은 대개 급진예술적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프리재즈가 일종의 전위음악이라는 일반인의 생각을 굳히곤 했다. 한편 1970년대 초에는 재즈-락이 더 대중들을 끌어모으는 분야가 되었다. 그러자 프리재즈 운동은 그 지녔던 힘이 빠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10년쯤 지나 프리재즈는 또 부흥하게 된다. 올드 앤 뉴 드림스(이전에 오넷 콜맨과 함께 연주하던 이들로 이루어진) 같은 예전 그룹들이 다시 재결성되기도 했고, 선 라의 오케스트라와 아트 앙상블 오브 시카고 같은 그룹은 이전보다 더 폭넓게 대중에게 알려졌다. 또 전문 음반회사가 세워졌는데 보기를 들면 FMP(독일), Black Saint (이탈리아), India Navigation(미국)같은 것들이다. 이로 인해 프리재즈 연주자들이 연주를 녹음하기가 더 쉬워졌다.
한편 새로운 연주자들이 나타나 연주양식에 참신한 차원을 더해 나갔다. 보기를 들면 앤소니 브랙스턴과 앤소니 데이비스같은 이들은 프리재즈와 현대 유럽예술음악 사이에 놓인 경계를 지워 버렸다. 또 월드 색소폰 쿼텟(특히 테너 색소폰주자인 데이빗 머레이)은 프리재즈와 스윙양식을 섞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데에 성공했다. 또 가네린 트리오는 모국 러시아 음악전통의 요소와 격렬한 연극 기법을 프리재즈에 도입하였다. 프리 재즈와 직접 연관을 맺지 않은 음악인들, 이를테면 팻 메스니(1985-6년에 오넷 콜맨과 함께 연주하고 녹음하였다.) 같은 이들은 자신의 음악양식을 꾸미는 한 장치로 프리재즈를 이용한다. 또 다른 이들은 새로운 잡종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는데, 제임스 "블러드" 울머 같은 이가 하는 "프리 펑크"(free funk) 같은 것이 그 좋은 보기이다.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이제 프리재는 재즈 역사에서 완전히 한 단계를 확고히 차지하고 있다. 또한 프리재즈는 창조력 넘치는 탐험에 아직도 무수히 펼쳐진 길들을 걸어나가면서, 끊임없이 발전해 나가고 있는 양식이다.
프리재즈와 퓨전(1970년대)
재즈는 갑작스럽게 모든 문화에 그 문화를 열어 놓게 됩니다. 일본에서부터 유럽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아프리카로부터 인도에 이르기까지 재즈는 오늘날의 '월드 뮤직'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울러 70 년대 뮤지션들에게 재즈는 너무도 엄격하고 고정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새로운 연주기법 을 찾기 시작했 는데 오넷 콜맨, 롤란드 커크, 마일즈 데이비스 등에 의해 주도되어진 당시의 새로운 재즈는 어떠한 구조로부터도 자유로왔던 것입 니다. 즉 템포에서 변화를 주기 시작했고 록으로부터 빌려운 사운드와 리듬 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전자 악기를 사용하게 됩니다. 이러한 재즈와 록의 '융합(Fusion)'은 70중반의 재즈계를 지배했으며 블러드 스윗 티어즈나 시카고와 같은 밴드들은 대단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동시에 존 맥러플린과 마하비쉬누 오케스트라, 허비핸콕, 그룹 웨더 리퍼트 등은 전자 사운드를 전면에 내걸고 이 퓨전 사운드를 대표하는 밴드로 활약하게 됩니다.
메인스트림(70년대와 80년대)
재즈의 역사에서 이 시기와 같이 여러 스타일이 한꺼번에 출연했던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이 시기에 많은 재즈 뮤지션들은 여러 재즈 스타일을 습득했고 그들 음악에 이 모두를 포함시켰던 것입니다. 모든 스타일을 한데 묶고 특정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 '80년대의 스타일'이 된 것입니다. 아울러 맥코이 타이너, 칙 코리아, 키스 쟈렛 등 여러 뮤지션들이 전통적인 리듬 섹션을 사용하여 재즈를 주류 또는 전통적인 방향으로 이끌었는데 이후 나타난 윈튼 마샬리스는 듀크 엘링턴과 디지 길레스피와 같은 재즈의 거인들로부터 자신의 음악을 끌어내어 젊은 뮤지션 중 이 흐름을 이끄는 인물로 등장하게 됩니다.
모던 그리고 컨템포러리(90년대)
90년대 재즈는 팝 음악으로부터영향받은 새로운 컨템포러리 크로스 오버 스타일을 우리에게소개 해주고 있습니다. 이 음악은 즉흥적인 솔로의 중요성보다는 멜로디에 대한 강조로다시 돌아서 고 있는데 이로 인해 스파이로 자이라, 케니 G, 퀸시존스 등이 히트 차트의 정상을 차지하기도 합니다. 한편 90년에 모던 재즈 사운드는 새로운 방향에 대한 모색만큼이나 전통적인 스타일에 대한 계승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아티스트로는 마커스 로버츠, 로이 하그로브, 그리고 조 라바노와 같은 인물들을 꼽을 수 있습 니다. 오늘날 재즈는 모든 음악으로부터 그 방향 을 모색해왔고 클럽이나 콘서트 홀, 라디오, 음반 등을 통해 광범위한 그리고 진지한 팬들을 확보한 음악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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