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왕후와 장희빈은 어떻게 사이가 틀어졌나요?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와 후궁인 장희빈은 처음에 사이가 좋았다고 알고있는데요. 어떤일을 계기로 사이가 틀어진건가요? 둘은 다시 사이가 좋아지진 않았나요?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관은 여흥(驪興)으로 민 유중의 딸이다. 숙종 7년 계비가 되었다. 숙종은 후궁 장씨의 미색에 혹하여 왕후를 멀리하였으며, 장씨가 왕자 균(:경종)을 낳자 윤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이 문제로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서인'이 밀려나고, 이후 민비는 폐위되어, 궁중에서 쫓겨나 폐서인이 되었다가 1694년의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다시 왕후로 복위하였다. 소생이 없었으며 능은 고양의 명릉이다. 예의바르고 정숙했다고 하며,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궁녀가 쓴 소설 《인현왕후전>>이 전해지며, 민비 폐비 조처를 반대하다 남해로 유배되어간 김만중이 숙종을 참회시키기 위해 <사씨 남정기>를 썼는데 그내용은 사씨의 처첩간의 갈등으로 숙종과 인현왕후, 장희빈의 풍자한 것이다.
[과한 욕심이 죽음을 부른 -장희빈]
조선 숙종의 빈으로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역관 장현의 종질녀로 어려서 나인으로 궁에 들어가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숙종 14년 왕자 균(뒤의 경종)을 낳았다. 이듬해 송시열 등 서인의 반대를 물리치고 남인의 지지를 얻어 균이 원자로 책봉됨에 따라 희빈으로 승격되었다. 이에 대하여 서인의 노론측 영수 송시열이 왕자 균을 원자로 세우는 것은 급한 일이 아니라는 상소를 올린다. 이 때문에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계 정치인들이 대거 유배되고 상소를 올렸던 송시열은 사사된다. 또 이 사건과 관련하여 중전 민씨(인현왕후)가 폐위됨으로써 희빈 장씨가 중전에 앉고 원자 균은 세자에 책봉된다. 이렇게 노론계가 정치 일선에서 제거되자 서인은 힘을 상실하게 되었고, 조정에 남인이 대거 등용되어 정국의 주도 권은 민암, 이의징 등의 남인에게 돌아가게 된다. 이 서인 대출척사건을 '기사환국'이라 한다.
장희빈의 강등과 갑술환국은 1694년 노론계의 김춘택과 소론계의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 복위운동을 전개한다. 권력을 잡고 있던 민암, 이의징 등은 이것을 기화로 서인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폐비 복위운동 관련자들을 모두 하옥하고 이들을 심문한 다음 숙종에게 보고한다. 하지만 이 당시 숙종은 중전 장씨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있었고 반면에 민씨를 폐위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던 중이라 오히려 민암 등의 남인을 축출해버린다. 그리고 중전 장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시키고 폐비 민씨를 복위시켰다. 또 노론계의 송시열, 민정중, 김익훈 등의 관작을 복구시키고 소론계를 등용하여 정국 전환을 꾀하게 되는데 이 사건이 '갑술환국'이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