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의 칭기즈 칸이나 그전의 칸과는 달리 영토 확장보다는 중원에서 자리를 잡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쿠빌라이 칸이 중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중국인들의 민심을 얻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미 몽골 제국이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영토 확장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칭기스칸이 죽자 몽케가 칸이 되고 몽케 칸은 쿠비라이를 중국인 거주 지대의 총괄 임무를 하는 한남한지대총독에 임명합니다. 몽케 칸이 남송 정벌 중 죽자 쿠빌라이는 즉시 회군해 개평에서 스스로 칸이 되어 남송 공격에 착수하고 1271년 국호를 원으로 칭했습니다. 칭기스칸은 연거리 1만8천km걸친 정복전쟁을 하면서 40개국을 짓밟아 멸망시킨 역사상 최대의 정복자였습니다.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및 인도 원정으로부터 귀국한 뒤 세 아들에게 분봉하였습니다. 장남 주치에게는 킵차크한국을 둘째 차가타이는 중앙아시아를 셋째 오고타이에게는 알타이 평원을 나눠주었지만 막내인 툴루이에게는 아무 땅도 주지 않았는데 이는 칭기스칸 사후 칭기스칸이 다스리는 땅을 물려받기 때문이었습니다. 툴루이는 세아들이 있었는데 몽케 쿠빌라이 훌라구입니다. 칭기스칸 사후 2대 3남인 오고타이가 칸이 되었을 때 툴루이는 몽골고원까지 오고타이에게 양도합니다. 이에 따라 오고타이 사후 툴루이 아들 중에서 칸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여 쿠릴라이(족장회의)에서 쿠데타적 수단으로 몽케가 칸이 됩니다. 몽케가 죽자 쿠빌라이가 스스로 칸을 선포하자 몽케 아들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를 진압하고 남송 공격에 주력하여 11년만에 멸망시키고 원으로 국호를 칭하게 된 것입니다.
쿠빌라이는 고려 원정과 고려의 항복을 성과로 대칸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리고 남송을 멸하고 국호를 원으로 합니다. 몽골은 징기스칸 사후 원과 4개의 한으로 나뉘게 되는데 대륙쪽으로는 팽창이 더이상 어려웠습니다. 4개의 한이 자리잡게 되었고 동남아 진출은 기병이 활약하기 어려운 밀림으로 어려웠습니다.
해상쪽 진출은 일본쪽으로 시도했는데 2차례 원정이 큰 태풍을 맞아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원나라는 안정쪽을 택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