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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4.07

후추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때는 언제인가요?

우리나라는 개항시기에도 다양한 향신료 뿐 아니라 다양한 여러 채소 들도 많이 들어왔다고 알고있는데

향신료 인 후추는 어떠한 경로로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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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1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07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한자어로는 호초(胡椒)라고 하며, 향신료로 쓰입니다. 후추나무는 후추과에 속하는 상록덩굴식물로 인도 남부가 원산지입니다.

    호초라는 명칭도 호나라에서 전래된 초(椒)라는 뜻이며 동양과 서양을 가릴 것 없이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입맛을 돋우는 향신료로서 군림하게 되었다고합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때 이인로(李仁老)가 지은 『파한집』에서 처음 그 명칭이 보여집니다. 따라서, 고려 중엽에는 이미 우리나라에 알려져 있었고, 송나라와의 교역으로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실제로 신안 앞바다에서 인양한 원나라 때의 선박에서도 후추가 발견되었다고합니다.

    또, 『고려사』에는 1389년(공양왕 1)에 유구의 사신이 후추 300근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고려 말에는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남방에서도 직접 후추가 도입되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후추는 수입품이었기에 매우 귀중한 물품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징비록(懲毖錄)』에 수록된 후추의 일화를 보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후추를 선호하였고 귀중히 여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한국의 경우 후추라는 작물 자체가 열대지방에서 재배되는 것이라 전량 외국에서 수입해야되었기 때문에 고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사치품으로 분류되었다. 고려시대 때 벽란도에서 아라비아 상인들과의 무역이 있긴 했으나 오늘날 보따리장수들의 거래 정도로 규모가 매우 작아 시세를 크게 낮추진 못했다.

    조선 시대로 넘어가서는 오히려 국가가 무역을 전면적으로 통제하면서 해외 무역이 더 줄어들었다. 일례로 일본과는 일년에 배 몇 척만 입항을 허가하는 식이였다. 이러다보니 불만이 생긴 일본인들이 유일한 일본발 항구였던 왜관에서 시위를 하는 등의 사태가 있었다. 이는 중국과도 마찬가지로 중국과는 조공을 보내는 사신단을 수행하는 수행원들이 월급을 주는 대신 원하는 물건을 들고가서 팔 수 있게 허락해주는 제한적인 방식의 무역만을 행하였다. 이런 조선의 무역 통제는 후추의 품귀를 야기하였다. 성종은 후추를 직접 길러보려고 일본, 류큐 왕국의 사신들이 올 때마다 후추 씨앗을 가져다주면 큰 상을 내리겠다고 할 정도였지만 류큐를 포함해 중국, 일본 본토에서도 남만, 즉 자바 일대를 통해 수입해서 썼기 때문에 얻을 수가 없었다. 일본에서 팔만대장경을 달라고 요구하자 "대장경판은 각지의 사찰에서 보관 중이니 너네 나라에서 자라는 후추씨와 교환하자" 는 엄청난 조건을 걸었으나 얻지 못했다.

    징비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일본에서 온 사신 유즈야 야스히로[27] 일행이 잔치 도중 일부러 술에 취하는 척 하면서 후추알을 던지니 너나 할 것 없이 일어서서 후추를 줍는 데 여념이 없어 자리가 난장판이 되자, 이 모습을 보고 야스히로는 "너희 나라는 이제 망했다. 나라의 질서와 사람들의 태도가 이렇게 엉망이니 어찌 망하지 않겠냐"며 비웃었다. 그가 일본으로 돌아가 이런 조선의 정세를 알리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본격적으로 침략준비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28] KBS 1TV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이 장면을 묘사한 바 있다. 당시에 후추가 얼마나 귀한 물자였는지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와서는 가격이 내려간다. 개항 전 조선 후기에 후추의 가격을 알려주는 사료는 찾기 힘들지만 다행히도 1808년 간행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 후추 가격이 적혀 있다.

    다시 말해 후추 1말(=18L)에 은 5냥이니 이를 다시 환산해 보면 후추 1되(=1.8L)는 0.5냥이다. 상평통보 4냥과 은 1냥이 교환되었으므로 조선 후기 후추 1되는 상평통보 2냥이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는 미국의 생활문화가 유입되었다. 그래서 깡통시장 같은 데서 흘러나오는 미국제 맥코믹 후추통을 1970~80년대에 볼 수 있었다. 지금도 남대문시장 근처 칼국수집 등에서는 이 맥코믹제 후추통을 볼 수 있다. 맥코믹은 21세기 들어서는 오뚜기 등 국산 식료회사들의 시장점유율에 밀려났고, 동네 슈퍼에서는 대부분 국내 브랜드 제품을 들여놓고 있다. 특히 오뚜기의 융단폭격으로 사실상 외제 후추통은 이제 자취를 감춘 상태.

    사실 후추는 국내 재배를 안 하기 때문에 100% 수입이고, 공장제 후추는 국산이나 외산이나 알맹이는 같기 때문에 맥코믹이나 오뚜기나 거기서 거기다. 오히려 수입산이라고 하면 갈아 쓰는 미주, 유럽 수입 브랜드 통후추를 지칭하는데, 그것도 원산지는 대부분 동남아시아이고 선별 기준, 포장 기술이 품질을 보장하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코타니 등이 유명하며 일종의 준전문용 향신료 취급을 받는다.

    후추 자체는 가정집마다 한 통 정도는 있으나 그렇게 빨리 소진되지는 않는다. 이유는 전술하였듯 고대부터 대중화된 작물이 아니다보니 후추를 적용한 한국 음식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흡사 미국 가정집에 타바스코 소스는 한 통씩 있으나 제 때 소진되지는 않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그나마 타바스코는 유통기한이 비교적 빠르지만 후추는 말려서 가루낸 것이 주로 유통되어서 오래간다는 게 차이점이다. 상기한 후추를 국내 재배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서 기인한다. 현대 한국 음식 중 후추가 그나마 쓰이는 쪽은 떡국이나 설렁탕 등 담백한 요리에 들어가는 정도가 대부분이며, 당연하지만 비교적 역사가 짧은 응용법이다.

    출처: 나무위키 후추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사』에는 1389년(공양왕 1)에 유구(琉球)의 사신이 후추 300근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으로 미루어 고려 말에는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남방에서도 직접 후추가 도입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후추는 수입품이었기에 매우 귀중한 물품으로 취급되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동양에서도 후추는 '귀하신 몸'이었다.

    중국에는 한나라 때 서역의 호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장건이 비단길을 통해 들여왔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후추라는 명칭도

    호나라에서 전래된 초(椒)라는 뜻의 '호초'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육식이 일반화된 임진왜란 전후인 14,세기경부터 후추가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같은 매운 맛의 향신료인 고추의 사용으로 이어진 것이지요. 후추는 고기의 누린내를 없애주는 방부제 역할도 하며 고기의 맛을 돋우어주기 때문에 고기요리에 딱 좋은 향신료였습니다. 후추를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던 조선은 일본의 침략(임진왜란)으로 후추를 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마침 임진왜란 전후해 어찌된 일인지 남만의 고추가 조선에 전래되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는 적어도 고조선 시대 후추 비슷한 향신료를 사용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원래 후추라는 것은 향신료의 일종입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신화를 보면

    "곰과 호랑이가 사람되기를 원하자 환웅이 쑥과 마늘을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환웅이 쑥과 마늘을 주었다는 것에서 고조선 시대에 후추 또는 후추 비슷한 향신료를 사용한 것으로 어떤 학자는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마늘은 향신료의 일종이기 때문입니다.


    1966년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3포의 유향이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유향이란 향료(향신료까지 포함한 넓은 개념)의 일종으로 방향제, 방부제,부스럼이나 복통의 약재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라 경덕왕 11년(752년)에 도일(渡日,일본을 건넘 즉 일본에 사신을 파견함을 의미)한 신라 사절의 대일매물명세서에 분향료(향료의 일종) 중의 하나인 침향이

    포함되어 있으며, 삼국사기 신라본기 흥덕왕 9년조(834년) 기사를 보면 침향을 차재(車材, 수레를 만드는 재목(목재))로 쓰는 것을 엄금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 기록으로 보아 후추 아니 후추를 포함한 향료는 신라시대 이전에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시대 백제는 저 멀리 동남아시아와 교류를 했는데 동남아시아는 후추의 산지입니다. 그러므로 백제시대였던 삼국시대에는 분명히 후추가 있었을 것입니다.



    참고로 후추에 얽힌 재미있는 역사를 소개하겠습니다.

    15세기를 보면 유럽이 동인도항로, 서인도 항로를 개척하는데 그것을 한 이유가 후추 때문이라고 합니다.


    실크로드를 통해 14세기 후추가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을 거쳐 중동을 지나 유럽에 전파되었습니다. 그 시대 유럽의 상황을 보면 전 유럽을 휩쓴 흑사병 때문에 농민의 수는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농노(중세 유럽 농민들)들의 생활을 향상시켰죠

    또한 곡류의 생산증가로 사람들은 더욱 많은 가축을 키울 수 있었고, 또한 제2차 농업혁명이 전개되어 무거운 쟁기를 가지고 깊은 밭갈이를 하면서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이제 유럽인들은 더 이상 굶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매일 고기를 먹을 수 있었지요

    하지만 그들의 고기 요리를 보면 꿀을 발라 구운 단순한 형태였습니다.

    하지만 후추가 유럽에 전래되면서 후추가 고기의 재료로 들어가자 고기의 맛과 질은 이전보다 더 뛰어났고 한번 후추의 맛을 본 유럽인들은 후추에 매혹되었습니다.


    당시 후추는 고기의 맛을 좋게 하였고, 물고기의 비린내를 없앴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입냄새를 제거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후추를 선호했습니다.


    후추는 당시 고가(高價)로 거래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려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후추가 생산지인 아시아에서 소비지인 유럽에 이르기 까지는 수많은 유통단계를 거쳐야 했습니다.

    당시 후추는 12단계의 유통구조를 통해 전파되었는데 중간의 아랍,베네치아 상인들이 이 후추의 유통구조를 통해 중간이익을 많이 챙겼지요


    우스갯소리로 당시 후추값은 금 값이었습니다.

    후추의 매매는 대개 바람이 없는 건물 내부의 책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상인은 핀셋으로 조심스럽게 후추를 집어 책상위에 놓았고, 소비자는 후추와 맞먹는 크기의 금으로 후추를 샀습니다.


    이와같이 후추를 통해 엄청난 이득을 겪는 것을 본 모험가와 유럽 왕실은 인도항로 개척에 열을 올린 것입니다


  • 고추는 일본에서 전해졌고 그 시기는 대략 17세기 초반입니다. 인도가 원산지인 후추는 고추보다 훨씬 먼저 전래되었다고 합니다. 고려 시대에 벌써 후추가 중국을 통해 들어와 있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에는 고려 때 이인로(李仁老)가 지은 『파한집』에서 처음 그 명칭이 보인다. 따라서, 고려 중엽에는 이미 우리나라에 알려져 있었고, 송나라와의 교역으로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신안 앞바다에서 인양한 원나라 때의 선박에서도 후추가 발견되었다.


  •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후추는 아주 오래 전부터 유럽에 인기가 많은 향신료였습니다. 후추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은 개항시기가 아니라 그 전 조선시대도 후추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조선시대 이전에 들어왔을겁니다.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 이인로가 지은 <파한집>에 후추가 처음 등장합니다. 이는 아마도 중국의 송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도입이 되었을 거라 추측하여 우리나라에서는 후추를 호초 하고 불렀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고려사>에는 1389년(공양왕 1)에 유구(琉球)의 사신이 후추 300근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고려 말에는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남방에서도 직접 후추가 도입되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후추는 수입품이었기에 매우 귀중한 물품으로 취급되었죠~『징비록(懲毖錄)』에 수록된 후추의 일화를 보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후추를 선호하였고 귀중히 여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후추는 인도와 인도네시아 등 남아시아 지역에서 원산지를 두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향신료 중 하나입니다. 후추는 고대 이집트와 로마에서도 사용되었으며, 중세 시대에는 유럽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한국에 후추가 처음 들어온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반인 조선 중종 때에는 이미 후추가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중국을 거쳐서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의 상하이와 남경으로부터 선운사, 지리산 등 경남 지방을 비롯해 전국 각지로 들어왔으며, 이를 전국 각지로 유통시키는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후추는 유통이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해상 무역이 발달하지 않아, 중국에서 들어온 후추는 인천, 부산 등의 항구로 운반되고, 거기서부터 다시 경남, 전남, 전북 등 내륙으로 운반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후추는 고가로 거래되었으며, 대부분은 궁중에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후추는 고대부터 한국에 알려져 왔으며 중국, 일본 등 주변국과의 교역을 통해 이 지역에 유입되었습니다. 후추는 의학적 특성과 요리 용도로 높이 평가되었으며 수프, 스튜 및 기타 요리의 맛을 내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오늘날 후추는 우리나라 요리에서 여전히 인기 있는 재료이며, 복잡하고 풍미 있는 요리를 만들기 위해 다른 향신료 및 허브와 함께 자주 사용됩니다.


  • 안녕하세요. 박정욱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후추는 인도가 원산지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인도에서 아랍을 거쳐 유럽으로 전해진 후 유럽인들에게서 일본과 중국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후에 중국과 일본을 거쳐 16세기 말에는 한국으로도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16세기 후반, 조선시대 후기에는 후추가 조선 왕실에서 사용되는 중요한 조미료로 인식되어 국왕의 명령으로 인도에서 직접 수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후 17세기에는 중국으로부터 수입하게 되었으며, 그 이후로는 다양한 경로로 수입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후추는 인도에서 시작되어 유럽과 아시아를 거쳐 조선으로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 왕실의 수입 명령이 후추를 대규모로 수입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에도 계속해서 다양한 경로로 수입되어 현재에 이르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