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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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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영부인 에비타는 왜 유럽을 순방했던건가요?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페론도 아니고, 영부인이 왜 여러 국가들을 순방했던 건가요?

무지개 여행이라고도 불린다고 하는데 영부인만 순방하는게 신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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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외교활동으로 방문, 스페인에서는 가난한 아동들에게 구호활동을 펼쳤고, 프랑스에서는 샤를 드 골을 만나 식량지원을 약속했습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만큼 인기와 인지도가 높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에비타는 외교 활동에도 기여하여 프랑스, 스위스, 포르투갈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큰 화제가 됐습니다.

    또한 이 순방은 '무지개 여행'이라는 부재로 남미국가 영부인으로는 최초로 <타임>(TIME)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영부인으로 활동하면서 훗날 '에비타 신화'로 불리우게 되는 전설의 본격적인 막이 올랐다. 에비타의 주요한 정치적 역할은 대중과의 소통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르헨티나 전국을 돌아다니며 이른바 데스카미사도(Descamisado, 셔츠를 입지 않은 사람)로 불리우던 가난한 노동자-서민계층을 주로 만나 페론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며 정부의 정책과 이념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고 합니다.
    이미지 연출에 능했던 에비타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전문 작가를 고용하여 대중을 감동시킬 수 있는 연설문을 완성하는 데 공을 들였습니다. 연설에서는 먼 곳에서도 대중들이 자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크고 적극적인 손동작을 많이 활용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에비타의 연설과 대중적 영향력은 페론의 정치적 입지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에비타는 매일같이 복지부 사무실에 출근하여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습니. 서민과 빈민들을 위한 구호활동은 대중들을 크게 감동시켰고 에비타는 '가난한 사람들의 성녀'라는 추앙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에비타의 명성은 아르헨티나를 넘어 유럽까지 퍼지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아르헨티나의 영부인 에비타는 1947년 6월부터 8월까지 유럽을 순방했습니다. 이 순방은 에비타의 정치적 야심과 아르헨티나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에비타는 순방 기간 동안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스위스, 포르투갈,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등을 방문했습니다. 각국 정상과 회담을 갖고, 아르헨티나의 발전을 위한 협력과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에비타는 순방을 통해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국제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또한, 아르헨티나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에도 기여했습니다.


    에비타의 유럽 순방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루어졌습니다.


    에비타의 정치적 야심: 에비타는 아르헨티나의 영부인으로서,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럽 순방을 통해 에비타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대통령직에 도전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국제적 위상 제고: 아르헨티나는 당시 세계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제 사회에서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습니다. 에비타는 유럽 순방을 통해 아르헨티나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국제 사회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습니다.

    에비타의 유럽 순방은 아르헨티나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에비타는 순방을 통해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아르헨티나의 발전을 위한 협력과 지원을 이끌어냈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 추천 부탁드려요 ~좋은 하루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