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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비둘기23.02.27

백년전쟁이 끝난이후 얼마지나지 않아서 장미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인가요?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전쟁이 끝난이후 두 국가는 엄청난 인명 재정적인 피해른 입은 상태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상황이면 회복을 하는 기간도 상당하다보는데 그리 길지 않은 시간후 영국에서 장미전쟁이 일어나게되었는데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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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플랜태저넷 왕가의 마지막 왕 리처드 2세가 숙부인 랭커스터 공의 아들인 헨리를 국외로 추방하였는데 아일랜드 정벌을 위해 리처드 2세가 자리를 비운 사이 헨리는 의회의 동의를 얻어 영국의 왕위에 올라 헨리4세가 되고 돌아온 리처드 2세는 유폐되고 암살된다.

    헨리 4세로부터 3대째인 헨리 6세는 나이가 어려 요크가의 리처드가 대신 섭정을 했고

    헨리 6세에게서 왕자가 태어나자 헨리 6세의 왕비가 섭정공인 리처드에게 불안감을 느껴

    그를 국외로 추방하게 되는데 거기에 격분하여 리처드가 헨리 6세에게 반기를 들고 시작된 것이 장미전쟁이다.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손자인 헨리 6세는 왕위의 자격이 없고 플랜태저넷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자신이 왕위를 이을 자격이 있다는 명분 하에 리처드는 자신에게 동의하는 귀족들을 모아 전쟁을 일으켰다.

    장미전쟁이란 이름은 랭카스터 왕조가 붉은 장미, 요크 왕조가 하얀 장미를 문장으로 삼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내란당시에는 요크의 하얀장미만 존재. 후에 랭카스터가 붉은 장미를 문장으로 삼았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영국에서는 백년 전쟁 후 왕위 계승

    문제로 장미 전쟁(1455~1485)이

    일어났다. 이 내란에서 거의 모든

    제후가 랭카스터와 요오크의 두 왕가를 중심으로 갈라져서 싸운 결과 대부분이 단절되거나 몰락한 자가 많았다.

    내란의 종결과 더불어 왕위에 올라

    튜더 왕조를 시작한 헨리 7세(1485~1509)는, 귀족 세력의 약화와 오랜 혼란에 지친 국민의 여망을 딛고

    강력한 중앙 징권 체제를 수립할 수가

    있었다.

    -출처: 우리역사넷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프랑스와 영국의 116년동안 전쟁 끝에 잔다르크의 영향으로 프랑스가 승리하게 되고

    패하영국의 왕권에 불만을 가진 대귀족 간의 전쟁을 벌였던 것이 장미 전쟁이고 흰장미와 붉은 장미를 내건 귀족집안 들의 전쟁이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랭카스터 왕가와 요크셔 귀족가문이 1455∼1485년에 영국에서 왕위계승권을 놓고 투쟁을 벌인 전쟁이며 입니다. 아래와 같이 간략히 설명해 드립니다.


    랭커스터왕조는 개조(開祖)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것이므로 3대째인 헨리 6세 때 요크공(公) 리처드가 랭커스터왕조 이상으로 왕위계승권이 있다면서 궐기하였으며, 여기에 귀족간의 싸움이 결부되어 내란이 일어났다. 이 내란의 본질은 귀족전쟁이라는 점에 있다. 장미전쟁이라는 이름은 랭커스터왕가가 붉은 장미, 요크가가 흰 장미를 각각 문장(紋章)으로 삼은 것에서 유래한 것이나, 내란 당시에는 요크가의 흰 장미만이 존재하였다.

    1455년 세인트올번스전투로 시작되어 1460년 리처드가 웨이크필드에서 전사하여 장남 에드워드가 그뒤를 이었다. 1461년 에드워드는 랭커스터파(派)를 타우턴전투에서 격파하고 헨리 6세를 국외로 추방했다. 에드워드는 이 싸움 직전에 즉위하여 에드워드 4세라 칭하고, 랭커스터파 사람들을 반역죄로 몰아 영지를 몰수하고 헨리를 체포하여 투옥하였다. 그후 에드워드 4세 옹립에 큰 공이 있었던 요크파의 워릭백작이 반란을 일으켜 1470년 에드워드 4세를 국외로 추방하고 헨리 6세를 구출했다. 에드워드 4세는 세력을 회복, 귀국하여 1471년 바넛전투에서 워릭 백작을 패사(敗死)시켰다. 그 결과 헨리 6세는 다시 붙잡혀서 살해되고 랭커스터왕조는 멸망하였다.

    에드워드 4세는 중앙집권화를 추진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의회를 열지 않고 중상주의적(重商主義的)인 정책을 채용하여 절대왕정의 경향을 나타냈으나 1483년 사망하였다. 12세 된 장남이 에드워드 5세로서 즉위하였으나 왕통이 확립되지 못하고, 전왕의 아우 글로스터공 리처드가 에드워드 5세를 투옥하고 리처드 3세라 칭한 후 동왕을 살해하였다. 이 무렵 대륙에 망명해 있던 랭커스터계의 리치먼드백작 헨리튜더는 1485년 웨일스에 상륙하여 보즈워스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패사시켜 30년에 걸친 장미전쟁은 끝났다. 헨리는 즉위하여 헨리 7세라 칭하고 튜더왕조를 열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 추천 부탁드려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백년전쟁 후 대부분의 왕족과 귀족 명문들이 사망한 프랑스는 쉽게 왕권 강화의 수순을 밟았다. 프랑스 내 영토를 모두 잃고 오히려 줄어든 영토를 둘러싸고 귀족들의 갈등이 심해졌다. 그 귀족들 사이의 왕위 쟁탈전이 바로 장미전쟁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년전쟁(1337년~1453년)이 종료된 이후 유럽에서는 몇몇 국가들이 군비를 축소하고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 경제적인 어려움과 불만이 쌓이면서 정치적인 불안정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75년부터 1482년까지 발생한 장미전쟁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내전으로, 왕족인 오를레앙가와 부르군디 성애자인 라 에스크 가문 사이의 피가 흐르는 갈등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두 가문은 왕위 계승권 문제를 중심으로 대립하였고, 이후 이들을 지지하는 다른 귀족들도 편향되게 이들 중 하나를 지지하게 되어 충돌이 더욱 격화되었습니다.

    장미전쟁은 프랑스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에는 프랑스에서 귀족 제도가 퇴조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