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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찬밀잠자리170
대찬밀잠자리17023.01.07

미켈란젤로가 예술에 미친영향??

박물관이나 각종 예술작품을 보니까 미켈란젤로가 만든 작품이 굉장히 많던데 미켈란젤로가 예술사에 미친 영향이 어떤게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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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가이자 건축가, 화가,시인으로 알려진 천재적인 예술가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거장중의 한명으로 불리우는데 본업인 조각에는 다비드상 피에타상이 있으며 회화에서는 시스타나 소성당에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남겼고 건축에서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남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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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 르네상스시대의 이탈리아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 ·시인.


    2. 이탈리아 카프레세에서 출생. 카프레세 출생.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나, 양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13세 때에 기를란다요(Ghirlandajo)에게 입문함.


    3. 조각가 베르톨도(Bertoldo di Giovanni:1420?∼1491)에게로 옮겨 도나텔로의 작품을 배우면서, 메디치가(家)의 고대 조각을 연구하였다. 그 때 로렌초 일 마니피코(Lorenzo il Magnifico:1449∼1492)에게 인정받아, 그의 집에서 체류하게 되어, 인문 학자들과도 접촉, 고전문학이나 신구약 성서를 탐독함과 동시에, 조각을 위한 인체 해부에도 전념하였다. 블랑카치성당 마사초의 벽화 앞에서 토레지아니와 논쟁하다가 코뼈가 부러진 것도 그 때의 일이며, 이때의 작품으로는 피렌체의 카사 보나로티에 남아 있는 도나텔로풍의 《스칼라의 성모》와 고전적 격조를 보인 《켄타우로스족과 라피타이족의 싸움》의 부조(浮彫)가 있다. 1492년 메디치가의 로렌초가 죽은 후, 프랑스군이 침입하자 볼로냐로 피난, 거기서 J.d.퀘르치아의 조각도 배웠다.


    4. 미켈란젤로의 작품 중에 아름답지 않고 의미가 없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의 많은 작품 중에서 ‘최후의 심판’을 예로 들어보면 이 작품 역시 도상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당시의 개념을 뛰어넘어 새로운 형태와 개념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 속에는 신성해야 할 성인들이 발가벗은 채 등장하고 천사들은 날개도 없이 못 생긴 얼굴을 하고 있는 등 기존의 개념을 완전히 벗어난 형태로 선보이고 있다. 게다가 가톨릭의 교리는 물론 프로테스탄트 사상까지 내포하고 있으니 한 인간의 폭넓은 사상을 마음껏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위대함은 작품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에도 기인하지만 그가 평생 잃지 않았던 자유분방한 사고와 작품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에도 기인한다. 미켈란젤로는 진정한 권력은 실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작가로서의 고집과 주관을 기라성 같은 후원자들 앞에서도 당당히 주장하는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그의 작품에 토를 달거나 그의 기분을 언짢게 한 자는 상대가 누구였던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 대상 중 한명이 비아지오 체세나라는 추기경인데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심판’을 그리는 작업 현장을 방문한 추기경이 벌거벗은 인물들에 대해 한마디하자 그를 지옥의 사신 미노스로 그려놓음으로써 영원히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바쁘다는 이유로 자신을 만나주지 않자 그 즉시로 “교황이 날 찾으면 내가 없다고 하라”고 전하며 로마를 떠나 피렌체로 내려왔고 교황이 다시 그를 부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는 일화는 권력 앞에서 당당했던 그의 용기와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보여준다.


    5. 미켈란젤로의 양식은 조각, 회화, 건축 각 분야에 걸쳐서 르네상스의 고전주의 완성에 기여하는 동시에, 특히 후반생(後半生)에 있어서는, 내면적 정념 표출을 강조하는 육체 표현과 복잡한 구성으로, 마니에리슴, 바로크를 예고하고 있다. 젊을 때, 사보나롤라의 사상과 피렌체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1530년대 이후 점차로 신비주의적 경향을 더한 사상 편력의 흔적이 많은 시나 서간 가운데 남아 있고, 거의 500점에 이르는 데상을 포함한 그의 작품들과 함께 동시대는 물론, 후세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주요작품 : 《다비드》(1504) 《최후의 심판 Last Judgment》(1541)




    <미켈란젤로의 생애>


    1475년 3월 6일, 이탈리아 카프레저에서 출생. 부친은 피렌체의 지방 행정관.

    1495년(20살) 교황의 특별 배려로 미켈란젤로, 연말경 피렌체로 귀환. 사보나롤라가의 인민의 정부제를 찬성한 피에로 프란체스코 데 메디치를 위해 〈세례자 요한〉, 〈잠자는 큐우핏〉을 조각.

    1496년(21세) 교황의 초청으로 6월 25일 로마를 방문.

    1497년(22세) 7월, 〈바커스상〉제작. 이 작품은 은행가 갈리의 주문에 의한 것임.

    1498년(23세) 추기경 리얼리오가 주문한 〈성 프란체스코의 성흔배수〉의 초벌 그림을 그림. 〈아폴론상〉제작.

    1499년(24세) 다음 해까지 〈피에타〉제작.

    1501년(26세) 봄, 피렌체 정부의 초청으로 피렌체 귀환.

    1503년(28세) 4월 24일, 피렌체 대성당을 장식할 12체의 등신대 12사도상 제작을 계약. 연말 〈드니가의 성가족〉, 〈성모자〉조각 착수.

    1508년(33세) 2월 21일, 〈율리우스 2세 상〉완성.

    1509년(34세) 1월 27일 부친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황으로부터 한푼의 보수도 받지 못했다고 불평.

    1510년(35세) 시스타나 예배당 천장화 제작을 계속.

    1523년(48세) 제네바 원로원으로부터 〈안드레아 도리아상〉을 의뢰받음. 11월 19일, 추기경 쥴리오 데 메디치, 새 교황으로 선출되고, 클레멘스 7세가 됨. 12월, 미켈란젤로 로마를 방문. 클레멘스 7세와 만나 성 로렌초 성당 도서관의 건립 계획을 부활시킴. 율리우스 2세의 묘각에 관해 유언 집행자들과 타협을 계속.

    1524년(49세) 〈아침〉, 〈저녁〉조각 작품에 착수.

    1525년(50세) 교황 클레멘스 7세, 성 로렌초 성당 천장화 제작을 의뢰. 12월, 교황의 거상 제작 계획을 호소하는 편지를 받음.

    1526년(51세) 3월 10일, 메디치가 예배당의 〈성모자〉, 〈로렌초 데 메디치〉상을 제작.

    1527년(52세) 5월 7일, 황제 군이 로마 점령. 5월 21일, 피렌체 공화제 선언.

    1528년(53세) 망명 중인 교황 클레멘스 7세, 미켈란젤로에게 메디치가의 두 공사를 속행하도록 거액의 돈을 줌.

    1529년(54세) 1월 10일, 피렌체 공화국이 영도하는 피렌체 방위 9인 군사위원으로 뽑히고, 4월 6일에는 축성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대세의 불리함을 깨닫고 9월 21일 피렌체를 탈출. 프랑소와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에 망명하려고 했으나 피렌체 공화국의 귀국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귀국, 축성장관으로 다시 일함.

    1530년(55세) 펠라라 공이 주문한 〈레다〉를 그림.

    1535년(60세) 새 교황 바오로 3세 시스타나 예배당의 〈최후의 심판〉을 다시 의뢰. 9월 1일 미켈란젤로, 교황청어용 최고 건축가, 조각가, 화가로 임명됨.

    1536년(61세) 교황 바오로 3세, 〈최후의 심판〉이 완성될 때까지 율리우스 2세 묘각 일에서 손을 떼도 좋다는 칙서를 내림.

    1537년(62세) 피렌체 공 알렉산드르 데 메디치 암살됨. 여류 시인 비토리아 콜로나와 깊은 우정을 맺음.

    1541년(66세) 10월 31일 〈최후의 심판〉공개됨. 교황 바오로 3세, 장엄한 미사를 집전.

    1542년(67세) 5월 16일, 율리우스 2세 묘각의 상부 건축을 위해 석공들과 계약 체결. 7월 20일, 바울 3세에게 10년 전의 계약에서 해방시켜 줄 것을 간청. 8월 20일 율리우스 2세 묘각에 관한 다섯 번째의 갱신 계약을 체결. 2체의 상은 다른 조각가에게 맡기기로 함.

    1543년(68세) 파올리나 예배당의 〈사울의 회심〉속행.

    1544년(69세) 6월, 중병에 걸렸으나, 스트로치가의 따뜻한 간호로 죽음을 면함.

    1545년(70세) 제자들 손으로 메디치 가 예배당 완성.

    1546년(71세) 1월, 재차 병을 앓아 스트로치가에서 치료를 받음. 파올리나 예배당의 〈성 베드로의 책형〉에 착수. 10월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감독에 임명되고, 12월 그 최초의 점토 모형을 제작.

    1547년(72세) 2월 25일 우애로 맺은 여류 시인 콜로나 사망.

    1548년(73세) 1월 9일, 동생 사망. 5월 2일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보낸 편지에서 「요도폐새」를 호소하고 「나는 3인의 교황(실제는 4인) 밑에서 일했으나 언제나 부친과 형제의 명예를 보지했다」고 술회.

    1550년(75세) 파올리나 예배당의 〈성 베드로의 책형〉완성. 이 해 최초로 미켈란젤로의 전기 「화가, 조각가 및 건축가의 생애」초판 출간.

    1552년(77세) 바티칸궁 계단을 설계.

    1555년(80세) 새 교황 바오로 4세, 그의 지위를 확인. 성베드로 성당 크폴라 건축을 의뢰. 이때 〈팔레스트리나의 피에타〉를 착수. 나중에 제자들이 완성시킴.

    1556년(81세) 2월 23일 우르비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나는 벌써 예측하기 어려운 비참한 것 외엔 아무것도 없다」고 술회. 9월 스페인 군이 접근하자 스폴레트로 피난. 이곳에서 교황의 귀국 명령을 받음.

    1560년(85세) 프랑스 앙리 2세 기념상을 디자인. 밀라노 대성당 묘비와 로마 성문을 설계했는데, 이 성문의 건조는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됨.

    1561년(86세) 로마의 산타 마리아 델 안젤리 성당을 개조 설계.

    1564년(89세) 2월 18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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