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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줍는 고블린
폐지줍는 고블린23.07.19

척준경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보면 무신이라고 불리기까지 하는

인물의 대표적인 분으로 알 고 있는데요

이렇게 대단하게 회자되는 분의 업적이 크게 두각되어 있지

않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 시대에서

일부 미화는 있겠지만 역사를 보면 더 대단한 위인들도 많았을텐데

왜 이분이 그렇게 회자되는건지. 큰 사건의 계기가 있었던건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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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7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중기의 무신 으로서 본관은 곡산이며

    윤관, 오연총,왕자지 등과 함께 함경도에 침입한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북 9성을 쌓는데 기여하였습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19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 무신으로 이자겸과 함께 인종을 폐위하고자 대궐에 침입했다 왕의 권유로 뜻을 바꾸어 자겸을 잡아 귀양 보내고 공신이 되었습니다. 이후 세도를 마구 부리다가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으며 복권되었으나 곧 죽었습니다.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볼 수 없는 만화 같은 무력의 소유자입니다. 한국사에서 등장하는 명장들은 대부분 최고 사령관의 위치에서 활동하였고, 따라서 일신의 무력보다는 전략 전술에 능한 유형이었습니다. 반면 척준경은 본인의 무력 그 자체가 유난히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매니아들이 한국의 소드마스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대여진 전쟁에서 활약을 펼쳤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척준경은 고려 중기의 무신입니다. 1062년 황해도 곡주에서 태어나 1144년 사망했습니다. 척준경은 뛰어난 무예와 전략적 능력을 갖춘 인물로, 1107년 윤관의 동북 9성 건설에 참여하여 여진족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습니다. 또한, 1126년 이자겸의 난을 진압하고 인종을 복위시키는 데에도 공을 세웠습니다. 척준경은 고려의 무신정권기의 대표적인 인물로, 그의 활약은 고려의 국력을 강화하고 몽골의 침입을 막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척준경은 뛰어난 무예와 전략적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지만, 또한 잔인하고 무자비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1126년 이자겸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백성들을 죽였고, 또한 1135년에는 의종을 폐위하고 인종을 복위시키는 과정에서도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척준경의 이러한 행동은 고려 사회에 큰 혼란을 가져왔고, 결국 그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척준경은 고려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립니다. 그의 뛰어난 무예와 전략적 능력은 고려의 국력을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그의 잔인하고 무자비한 행동은 고려 사회에 큰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척준경은 고려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밖에 없는 인물입니다. 참고하셔서 도움되셨길 바래용 ^^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를 넘어 한국사 전체에도 손꼽히는 명장으로 하급 남반관리 출신으로 숙종 명효왕 대에 무관이 되었고 예종 시기 여진정벌에 참여해 큰 공을 세웠으며 고려 초기 유금필, 양규, 후기의 회쳥, 이성계와 함께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무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여진 정벌기 내내 독보적인 전공을 쌓았습니다.

    군대를 통솔할 때 혁혁한 성과를 보여줬는데 단신으로 보여준 퍼포먼스는 말이 안되는 수준으로 혼자 공성전의 판세를 뒤엎고 전멸직전의 상황에서 10명 남짓한 결사대로 지원군이 올때까지 시간을 벌였으며 성이 포위당한 상황에서 결사대와 함께 무장한 병사 십여명을 거뜬히 베어넘겨 포위진을 와해, 밤을 틈타 포위를 뚫고 국경까지 달려 구원군을 편성해 왔습니다.

    윤관 휘하로 들어가기 전부터 뛰어난 맹장으로서의 편린을 보였고 윤관 휘하로 들어가서는 윤관의 기록 대부분에 이름을 올린 그는 1,2차 덩벌 동안 재상인 윤관과 친해졌으며 전쟁 종결 후 문관직에 올라 점차 강한 권력을 쥐게 됩니다. 동북 9성을 세울곳의 지형조차 제대로 다 파악하지 못하고 벌어진 9성 정벌은 그가 없다면 윤관이 전사하는 비극으로 끝났을 수도있습니다.

    인종 대에 외척 이자겸에게 포섭되어 정원을 주도했지만 결국 인종에 의해 제거됩니다. 척준경은 전쟁에서의 공은 걸출했으나 정쟁에서는 갈피를 잡지 못했고 결국 초라한 결말로 이어져 후대의 평가도 갈리게 되지만 무예를 놓고고면 척준경은 따라올수 없는 전공을 세운 무사입니다.

    한국사에 등장한 무장 중 전술 전략의 구상, 지휘형태가 아닌 개인의 무력만으로 척준경보다 더 큰 전공을 세운 무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척준경 본인은 단순히 순수한 무인이었을 뿐 나름의 정치적 식견은 가지고 있지 않았고 성품이 고결하지 않았지만 표리부동하지도 않았으며 전장에서는 일당백이었으나 배움이 짧고 인간됨이 맞지 않아 큰 그림을 그리거나 정국을 주도할 능력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권력을 다룰 줄 몰라 본인을 올바른 방향으로 써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여진과의 전쟁때는 고려의 명장이자 존경받는 문관인 윤관의 밑에서 전공을 쌓고 구국의 맹장으로 이름을 남겼지만 그를 써준 사람이 하필 권신 이자겸이라는 간신을 지키는 맹견으로 전락하여 전횡에 일조하다 뒤늦게 임금의 편으로 돌아섰음에도 반역 열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척준경은 고려의 무신이자 정치인이었습니다. 1104년 ~ 1109년까지 여진족을 토벌하고 몰아내는데 공이 컸습니다. 당시에 여진족은 만주쪽에 살면서 우리나라의 위협이 됐었기 때문에 골치아팠는데, 천준경이 이 여진을 잘 소탕했습니다.

    근데 나중에는 이자겸이라는 인물과 합심해서 권력을 높이고 나라를 어지럽히는데 많은 일을 해서 결국 유배되고 이자겸과 갈등이 있어서 이자겸을 제거한 공으로 유배에서는 풀려났으나 얼마안가 죽습니다.

    전장에서 활약한 만 전횡도 있었기에 업적이 크게 두각되지 않은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안경국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척준경(Chuck Jung-kyung)에 대해서는 저는 2021년 9월까지의 정보만 알고 있으며, 해당 인물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 수는 없습니다. 또한, "척준경"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척준경"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해당 인물이 유명한 분야(예: 역사, 문화, 예술 등)나 그와 관련된 사건, 출처 등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저는 2021년까지의 역사와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대체로 알고 있으니, "척준경"과 관련된 더 구체적인 정보를 알려주시면 가능한 범위 내에서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인종 때 이자겸과 함께 정변을 일으킨 무관. 곡주(谷州)의 향리출신으로 집이 가난해 학문을 할 수 없었고, 무뢰배와 놀면서 서리가 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계림공(谿林公, 숙종)의 부(府)에 가서 종자가 되었다. 그 뒤 추밀원 별가(別鴐)에 임명되었으며, 1104년(숙종 9)에는 평장사 임간(林幹)을 따라 동여진 정벌에 나섰다가 공을 세워 출세했다. 그 후 이자겸과 혼인관계를 맺고 1126년(인종 4)에 이자겸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자겸과 사이가 벌어진 틈을 타 최사전(崔思全)이 이를 회유하고 또 왕의 권유를 받자 이자겸을 잡아 귀양 보냈으며, 그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의 호를 받고 문하시중에 올랐다. 그러나 뒤에 정언(正言) 정지상(鄭知常)이 대궐을 침범한 사실을 탄핵해 암타도(巖墮島)에 귀양 보내졌으며 이듬해 곡주(谷州)에 유배되었다. 1144년(인종 22)에 다시 조봉대부 검교호부상서(朝奉大夫檢校戶部尙書)를 제수받았으나 몇 달 뒤 등창으로 곡주에서 죽었다.

    출처 : 한국고중세사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