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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3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영향은 어떤게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십자군 전쟁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사건인가요?

그리고 십자군 전쟁으로 인하여 사회,국가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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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십자군전쟁의 영향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의 권위 상실

    십자군 전쟁은 9차까지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예상과 달리 성지인 예루살렘 탈환에 실패함으로써 교회가 패배한 전쟁이 되고 말았다. 이는 중세 흑사병의 도래와 함께 14세기 들어 교회의 세력이 쇠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전쟁은 거의 2백 년에 걸쳐 발생했으며 교황권이 절정에 달했을 때였으므로 비록 원정이 실패한 뒤에도 한동안 교회의 영향력은 막강하였지만, 이후에는 꾸준히 세속 권력과 이교의 영향력이 성장하였다. 교황은 십자군 원정 시기의 권위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당시 전쟁의 실패에 따른 신앙의 약화는 유럽 곳곳의 기록에서 산발적으로 나타났다. 신이 기독교를 버렸다고 여긴 일부는 무함마드를 숭배하기까지 하였다. 카타리파가 잔존했던 프랑스 남부에서 가끔 일어났던 일이었다.

    *장원의 해체

    도시와 상업이 발달하고 화폐 사용이 늘어나면서 장원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영주는 농노에게 부역과 현물 대신 화폐를 지대로 받았는데, 때로는 돈을 받고 농노를 해방하여 주기도 하였다.

    14세기 중엽 흑사병의 유행으로 인구가 크게 줄어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변화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하지만 일부 영주는 오히려 농노에 대한 속박을 강화하여 저항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농노를 기반으로 하는 장원이 해체되어 갔고 봉건 사회도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국가들의 정세

    십자군은 동방의 문물이 서방에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고 반대로 서방의 문물이 중동으로 전해지는 계기도 되었다. 서유럽과 중동 지역의 무역로가 뚫리면서 지중해 무역을 하는 이탈리아의 국가들의 경제적 이윤이 컸고 중동식 성곽 건축을 본 유럽의 제후들은 앞다투어 장점을 포용해 자신들의 성을 개량했다.

    서유럽 국가들의 중무장한 기사에 크게 패배한 초창기 중동의 이슬람 군주들은 서유럽식 중장기병과 갑옷,장비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한편 이 전쟁 와중에 이슬람과 기독교는 종파와 이해관계로 사분오열되어 서로서로 싸우는 일이 빈번했다. 이슬람의 영웅이라던 살라흐 앗 딘조차도 다른 종파에서 고용한 자객들에게 죽을 뻔했다. 십자군이 헝가리로 쳐들어갔다가 되려 깨져버린 일이나, 알비주의 십자군처럼 내부의 충돌도 끊임없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이 서로 손을 잡고 적을 공격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 러시아 공국들의 쇠퇴

    그 외에 자세히 언급되지는 않지만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의 공국들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키예프 공국 같은 러시아 공국들이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 제국이 북아프리카를 장악하고 사라센 해적들이 판을 쳐 지중해 무역이 불가능하자 아예 흑해와 러시아 공국들을 지나 발트해로 가는 무역이 성행하였기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으로 이탈리아 상인들이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하고 상권을 장악해 러시아를 지나는 물류의 양이 급감해버리자, 대부분의 수익을 교역에 의지하는 러시아 공국들은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23] 4차 십자군 직후 몽골이 침공해오자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제외한 모든 러시아 공국들은 멸망당하거나 칸국의 봉신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 공화국과 헝가리 왕국의 이득

    반면에 이탈리아의 공화국들,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노바 공화국,그리고 헝가리 왕국은 십자군을 통해 많은 이득을 얻었다. 베네치아는 직접 그리스의 상당 부분을 식민지로 만들었고, 제노바 역시 그에 못지않은 힘을 얻게 되었다.또한,헝가리 왕국은 비잔틴의 속령에서 풀려,은화를 개발할겸,수도사 율리언은 콘스탄티노플에 거쳐서 우랄 산맥 근처의 헝가리 주민을 만날수 있었다. 이들의 경쟁 관계는 키오자 전쟁이 베네치아의 승리로 끝나기 전까지 지속된다.반면에 헝가리도 5차 십자군 전쟁에 합류하게 된다.

    *이슬람권에 대한 충격

    십자군은 레반트 일대를 둘러싼 이슬람 국가들에게는 충격이었지만 이미 중앙아시아, 인도 등으로 멀리 퍼진 이슬람 세계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몽골의 침략과 바그다드 파괴가 정신적, 종교적인 관점에서나 물리적인 파괴력에서나 파급력이 더 컸다. 어쨌든 이 시대 서쪽으론 십자군, 동쪽으론 몽골이란 이슬람교 창시 이래 실제 권력은 어쨋든간에 명목상이나마 전세계 무슬림들의 지도자인 칼리파제 자체가 소멸할 위기를 겪은 이슬람 세계는 십자군, 몽골계 칸국들을 극복하며 새로운 종교문화와 함께 강력한 이슬람 제국을 복원시킨 화약제국의 시대가 들어서면서야 안정을 찾게 된다.

    * 동로마 제국: 몰락의 길

    동로마 제국의 경우에는 초반에는 룸 술탄국에 빼앗겼던 아나톨리아 동부 해안 등을 대거 수복하는 등 어느 정도 이익을 보았지만, 십자군 깽판으로 경제적, 안보적 피해 역시 많이 입었고 무엇보다도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수도가 털리면서 결국 강대국 대열에서 영원히 탈락하였으며 이후 이백 수십 년간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 에티오피아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에티오피아 제국도 십자군 전쟁에 영향을 받았다. 이슬람권에 포위된 유일한 기독교 국가였던 에티오피아는 십자군 국가들과 연합하여 이슬람 국가들에 대항하려고 했고 실제로 소규모의 지원병을 보내기도 하였다.[24] 한편 살라딘이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키고 예루살렘에 상주하고 있던 에티오피아 정교회 사제들을 초청해 회담을 나누고 순례세금을 면제시켜주기도 했다.

    이 시기 에티오피아는 랄리벨라라는 곳에 제2의 예루살렘을 건설한다고 여러 건축물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14세기에 이르러서는 웨뎀 아라드 황제가 교황에 사절을 보내 로마, 아비뇽, 스페인, 포르투갈을 둘러보고 프랑스와 같이 이집트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이미 십자군 전쟁이 거의 끝을 보는 상황이었고, 또 대립교황과 교황이 서로 반목을 하는 등 유럽 교회도 혼란이 극심한 상황이었던지라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몽골 제국의 영향

    한편 몽골 제국이 1200년대 후반에 이슬람권을 공격하면서 유럽에 사제왕 요한의 전설이 퍼졌다. 십자군 국가들은 분열된 몽골 제국 중 하나인 일 칸국과 연합하여 이슬람 국가들에 대항을 꾀했고 네스토리우스파를 믿었던 몇몇 몽골 군주와 그 아내의 영향으로 교황 및 프랑스왕과 서로 사신을 주고 받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 일 칸국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맘루크 왕조의 맹활약으로 몽골이 밀리자 그 연합도 점차 쇠퇴하게 된다.

    *동방과의 교류

    또한 고대시대 수준의 괴철로를 사용해서 연철을 만들고 연철을 침탄해서 적은 양의 강철을 얻었던 서양에 동양의 최신식 고로가, 아마도 십자군 전쟁 혹은 몽골의 정복전쟁으로 서양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이를 통해 값싼 철제 연장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주철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고로에서 생산된 선철을 탈탄해서 연철이나 강철로 만드는 정련로도 서기 1200년경에 도입되거나 발명되며, 이후 수력 풀무질까지 발명하면서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 독일 등지는 철강업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게 된다.

    그런데 고로만 넘어가고 강철의 대량생산에 필요한 초강법은 넘어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25] 단, 초강법은 근현대 제철과는 다른, 철강의 질이 아니라 양을 늘려주는데 의의가 있는 방법이고 철강의 질 자체는 오히려 단조보다 떨어지기에[26] 중국에서도 질좋은 고급무기는 초강법이 아니라 다른 문화권과 마찬가지로 단조를 써서 만들었다. 반대로 연장이나 일상용품은 연철이나 주철로 만들어도 큰 불편이 없었기 때문에 고로만 도입되고 초강법이 도입되지 않은 것은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거기다 전쟁중에 접한 다마스쿠스 강으로 생산된 무기에 서양은 충격을 받았으며 다마스쿠스 강이 재료의 차이가 아닌 특수한 재조법이 있다고 생각했던 유럽인들은 다마스쿠스 강을 만들기 위한 열정으로 철에 수천 수만번의 실험을 하기 시작했고 근세에 이르러서는 열처리 스프링강을 완성 이를 이용한 태엽, 플레이트 아머, 기계식 시계, 플린트락, 아바레스트같은 발명을 이루었으며 결국에는 동양과 서양의 기술력 차이를 불러왔다고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또한 예루살렘을 기점으로한 실크로드를 결과적으로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향료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던 유럽인들은 실크로드를 대체하는 다른 길을 찾게 되었으며, 이는 대항해시대의 서막이 되었다.

    *유대인 학살
    십자군 전쟁은 당시 유럽 각지에 살고 있던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에게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종교적 광기로 이성을 상실한 병사들, 민중들이 게토로 쳐들어가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일은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 이후 12세기와 13세기 초까지 빈번히 일아났다.

    민중 십자군 때에는 주로 독일 (쾰른, 마인츠 등지)에서 학살이 집중되었고 2차 십자군 때에는 프랑스와 독일, 3차 십자군 시에는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대관식이 겹친 잉글랜드의 요크, 런던 등지에서 수백명이 화형당하였다. 유대인들은 무기를 들고 저항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집단 자살로 소멸하는 경우가 많았다.[27] 13세기 초, 제5차와 6차 십자군 때에 재차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었지만 이번에는 그 주모자들이 처형당하는 벌을 받았다. 신성로마제국 황실은 기본적으로 유대인을 제국의 신민으로서 존중해 주었다. 이렇다보니, 현대 이스라엘이나 유태인들에게도 십자군이라는 이름은 달가운 이름이 아니다. 그래서, 조지 워커 부시가 크루세이더라고 미군을 십자군인양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파병한 것을 이야기하자, 부시 측근 유태인 정치인들도 그런 명칭은 좀 삼가달라고 충고하며 미국 내 유태인들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이름이라고 우려했을 정도였다.

    출처: 나무위키 십자군 전쟁


  • 수려한벌11
    수려한벌1123.05.23

    십자군 전쟁은 11세기에서 13세기에 이어진 기독교 성지지키기를 목적으로 한 군사적 출정입니다. 기독교 성지인 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을 이슬람교로부터 해방하고 기독교 신자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선포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서유럽의 기독교 국가들과 이슬람 국가들 간의 충돌로 이어졌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전개되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다음과 같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1. 종교적 영향: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와 이슬람 국가들 간의 종교적 갈등을 고조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서유럽의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 사이의 긴장과 대립이 깊어졌으며, 이후 여러 종교 간 갈등과 충돌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2. 사회적 영향: 십자군 전쟁은 군사적 출정으로 많은 기사들과 군인들이 동원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기사층과 군인층이 강화되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했습니다. 또한 십자군 전쟁은 서유럽의 사회, 경제, 문화 등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이를 통해 서유럽 국가들 간의 상호작용과 교류가 활발해지기도 했습니다.

    3. 정치적 영향: 십자군 전쟁은 서유럽의 국가 간 관계와 정치적 형평을 변화시켰습니다. 많은 국가들이 십자군 움직임에 참여하면서 서로 협력하거나 대립하는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또한 세력의 갈등과 변동이 있었으며, 일부 국가들은 십자군 전쟁을 이용하여 영토 확장과 권력 강화를 추구하기도 했습니다.

    4. 문화적 영향: 십자군 전쟁은 문화적인 교류와 영향을 미쳤습니다. 기사들은 동방에서 새로운 문화와 기술을 접하
      접하면서 서유럽으로 가져와 도입하였으며, 이를 통해 서유럽의 문화와 예술이 발전하였습니다. 또한 십자군 전쟁은 크리스천 기독교의 신앙과 도덕적 가치에 대한 강조와 선포를 일으킴으로써 서유럽 사회의 종교적 강화를 이끌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다양한 영향을 미치며 중세 유럽의 역사와 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이 전쟁은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간의 교류와 갈등, 종교적 갈망과 정치적 이익을 엮어놓은 복잡한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