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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낙타174
순수한낙타17423.06.21

10. 26 사태는 왜 일어나게 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10. 26 사태는 왜 일어난 것인가요?

김재규의 주장대로 민주주의를 위해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한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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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2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재규는 닉슨 독트린에 저항하는 박정희의 자주국방 정책에 대서 매우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0.26 암살사건 재판 뒤 항소이유보충서 기록에서 김재규는 대한민국의 자주국방 실현에 대해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하며 박정희의 정책을 비판하였습니다.

    이것이 사건의 배경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파벌싸움과 정준하의 쿠테타 기획 또한 이 사건의 배경입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군사 정권 내부에서 정권 다툼이였습니다. 김재규는 궁정동 중앙정보부 밀실에서 박정희 대통령,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다가, 부산과 마산의 민주화 시위 원인이 중앙정보부의 정보 부재 탓이라고 비난받자, 대통령과 차지철을 총으로 살해했습니다. 김재규가 사형을 언도 받기 전 자신은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박정희 대통령을 죽였다고 마지막말을 전했는데 그건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 하기 위한 말 뿐이라고 생각 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박정희 신임을 받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이 무렵 정보업무 수행과정에서의 무능을 이유로 박정희로부터 몇 차례 힐책을 받았고 대통령에게 올리는 보고나 건의가 차지철 경호실장에 의해 번번이 제동이 걸리는 등 박정희와 차지철에게 불만이 쌓여있던 중 10월 26일 궁정동 중앙정보부 밀실에서 박정희와 만찬을 함께 할 기회가 생기자 이 기회에 암살하기로 결심, 계획을 실행할 준비를 하는 한편 암살 직후 쿠데타를 일으킬 목적으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중앙정보부 차장보 김정섭을 궁정동 별관에 대기시킵니다.

    5시 40분 경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이 먼저 도착, 김재규는 그에게 차지철 살해를 암시했고 평소 차지철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김계원은 동조하듯 이를 묵인합니다. 6시 5분경 만찬이 시작되고 식사 중 박정희가 부마사태를 중앙정보부의 정보부재 탓으로 돌려 김재류를 힐난한 데 이어 차지철이 과격한 어조로 그를 공박하자 흥분한 김재규는 밖으로 나와 2층 집무실에서 권총을 가지고 만찬회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직속부하 박흥주와 박선호에게 총소리가 나면 경호원을 사살할 것을 지시, 7시 35분경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확인한 그는 차지철과 박정희에게 각각 2발씩 쏘아 두 사람을 절명시킴으로 18년간의 1인독재정권과 유신체제는 종말하게 됩니다.

    사건 직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김재규를 대통령 살해범으로 체포,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27일 새벽 4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이 사건으로 김재규, 김계원, 박흥주, 박선호에게 사형이 선고, 김계원을 제외한 나머지 전원에게 사형이 집해되었습니다.

    이 사태의 발생원인에 대해 아직 정확히 규명된 바는 없고, 박정희와 차지철에 대한 김재규의 사감때문이라는 설, 김재규 자신의 말대로 부마사태의 참혹한 현장을 보고 박정권의 정당성에 회의를 품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설, 사건 전날인 25일 아시아협회 주최의 만찬회에서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 존 베시 육군참모총장이 한 발언 등을 근거로 미국이 개입했을 것이라는 설 등이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18년간 권좌에 있으면서 1인 집권의 권위주의를 계속 강화하여 나아갔다. 특히 헌정 질서를 파괴하면서 1972년 10월에 등장한 유신체제는 억압적인 비민주적 정치를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1970년대 후반으로 넘어 오면서 그 동안의 정치·경제적 모순들이 폭발하기 시작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중화학공업에 대한 무리한 투자로 상황이 악화되어 있었다. 중화학공업화의 추진은 이 부문에로의 중복, 과잉 투자로 인한 효율성 상실과 소비재 품목 품귀라는 이중의 문제를 야기하였다. 이는 곧 인플레이션으로 연결되었는데, 1979년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한국경제의 고성장 전략 추진과정에서도 그 유례가 없는 18.3%에 달하였다.


    고도성장으로 1인 장기집권의 정당성을 보상받으려 하였지만 독재와 인플레이션 등으로 인해 민심은 체제로부터 등을 돌렸다. 또한 수출주도형 공업화에 의한 고도성장 전략은 노동자와 농민의 상대적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었는데 경제 위기의 심화 과정에서 이들 계층의 소외감도 점차 심화됨으로써 그들의 생존권 요구도 거세어졌다.


    대외적으로는 1977년에 출범한 미국의 카터(Carter, J.) 행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미군철수라는 카드를 이용해 한국의 인권상황을 개선하려 하였으나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거부해 한·미간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또한 박정희는 자주국방을 달성하기 위하여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시도하면서 미국을 자극하였다.


    이에 박동선(朴東宣) 사건까지 겹쳐 한·미관계는 최악의 상황까지 치달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야세력과 야당은 반 독재 민주화 운동과 민중의 생존권 투쟁을 계속 전개해 나갔다. 1972년 유신체제 출범부터 긴급조치와 계엄, 재야인사의 구속 등이 계속되었으나 민주화의 방향을 거스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특히 1978년과 1979년은 정치·경제적 모순이 정치적 위기로 연결된 시기였다

    1978년 동일방직사건과 함평고구마수매사건 등의 생존권 투쟁은 민주화 운동의 수준을 급격히 고양시킨 사건이었다. 그 해 12월 12일의 제10대 국회의원총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32.8%의 득표율을 올려 여당인 공화당의 득표율 31.7%를 앞지르게 되었는데 이는 민심의 이반(離反: 민심이 떠나서 배반함) 현상이 표출된 사례인 것이다. 이에 집권여당은 위기감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극단적인 강경 대응 이외에 여타의 대응책을 찾지 못하였다.


    1979년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오원춘 사건은 유신정권과 가톨릭 세력의 정면충돌을 야기시켰다. 1979년 8월의 YH사태는 이전의 노동소요가 절정에 이른 사건이었다. YH무역은 소규모 수출 업체로서 사장이 체불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미국으로 도피한 상태였다.


    YH노조의 여공들은 자신들의 생존권 보장을 위해 당시 김영삼(金泳三) 총재하에서 유신정권에 대한 강경 투쟁을 전개하던 신민당사로 들어가 농성을 벌였다. 경찰은 8월 11일 여공들을 강제로 해산시키기 위해 당사내로 진입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여공 김경숙이 건물 옥상에서 투신해 사망하였다.이에 대해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는 사인은 경찰의 과잉진압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YH사태는 소규모의 비체제적인 노사갈등에 불과하였으나 정권에 대한 도전이 조직화되는 상황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일종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야당을 비롯한 전 민주화운동세력과 유신정권 사이의 첨예한 대립을 야기시켰던 것이다. 김영삼은 유신철폐의 선명한 기치를 내걸어 중도통합론을 표방한 이철승(李哲承)을 1979년 5월의 전당대회에서 누르고 신민당의 새로운 대표로 등장하였었다.


    김영삼은 박정희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였고, 외신기자클럽 회견에서 통일을 위해 김일성(金日成)을 만날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였다. 정부는 이에 김영삼의 축출을 기도하였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신민당 대의원 2명이 전당대회 당시 투표권이 없음을 선언하였고, 김영삼의 정적인 이철승계의 인물들이 전당대회 결과의 무효를 제소해 법원은 김영삼의 총재직 박탈을 결정하였다.


    국회는 더 나아가 김영삼의 9월 16일자 〈뉴욕타임스〉지 회견 내용이 국가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10월 4일 그의 국회의원직까지 박탈하였다. 결국 정부는 야당까지도 제도권 정치의 틀 밖으로 내모는 형국을 초래하였다. 그 동안 쌓였던 국민의 불만이 김영삼 출축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창원 등지에서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것이 유신체제의 종말을 초래하였던 부마항쟁으로서 이 지역은 김영삼 총재의 근거지이기도 하였다.


    10월 15일의 시위는 부산대학교의 학생시위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날의 시위는 주동자들이 연행됨으로써 확산되지 못하였으며, 본격적인 시위는 16일부터 이루어졌다. 16일 교내에서 집회를 가진 부산대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하였고, 이에 동아대·고려신대, 고등학생, 전문대생 등의 학생에다가 일반시민까지 가세하였다.


    3,000여 명의 시위대는 게릴라식으로 경찰과 충돌하였고 자정에 이르도록 격렬한 시위를 계속하였다. 17일에는 부산대에 휴교령이 내려졌으나, 날이 어두워지면서 시위는 더욱 확산되었다. 시민들의 호응 속에서 시위군중은 경찰서·파출소·세무서·동사무소·신문사·방송국 등에 투석하였다.


    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16일부터 17일 이틀 동안 경찰차량 6대가 전소되고 12대가 파손되었으며, 21개 파출소가 파손 또는 방화되었다. 18일 자정에는 부산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공수부대 등의 군병력이 투입되어 시위군중을 진압하였다. 18일에는 경남·마산 일원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경남대에 무기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 오후 6시경부터 시작된 시위는 곧 2,000명의 시위군중을 이루어 공화당사를 공격하고 파출소·신문사·방송국·법원·검찰청·동사무소 등에 피해를 입혔다. 19일 밤에도 마산·창원 지역에 이러한 사태가 계속되자 20일 마산·창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였다.


    박정희의 퇴진을 요구한 정권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던 부마항쟁은 강경진압에 의해 일단 해결되었으나 그 대응 방식을 둘러싼 집권층 내부의 갈등을 야기시켜 10·26사태를 발생시켰다.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車智澈)은 부마항쟁에 관한 강경진압을 주장하였으며,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이었고 양인은 서로 경쟁적인 입장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차지철의 입장을 수용해 강경진압을 채택하자 차지철의 견제로 진퇴위기에 몰린 김재규가 10월 26일 만찬 도중에 박정희와 차지철을 살해하였다. 김재규는 군 후배인 차지철의 월권과 자신에 대한 무시, 그리고 그에 대한 대통령의 편애를 견딜 수 없었다. 그날도 박정희는 부마항쟁의 책임을 중앙정보부의 정보 부재에 돌렸으며, 차지철도 중앙정보부의 무능함을 지적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