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자식이 없으면 대가 끊긴다고 자식 많은 집에서 양자를 들였는데 양자를 들일때 기준은 무엇이었나요? 같은 혈족내에서만 양자를 들일수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새침한부엉이49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핏줄에 대해 자부심과 사람에 대한 귀천이 있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형제간의 자식을 데려오는걸 선호했습니다
그것도 귀하면 씨받이라도 얻어서 자신의 아들을 얻고자 했습니다
씨받이도 아무나 하지않고 몰락한 사대부집 여인네에게서 돈을 주고 거래를 했습니다
아마도 가지고 있는 인간의 기본 인성 인품을 중요시 했던것 같습니다
양자는 보통 자신의 가문내에서
양자를 들였습니다.
그래야 같은 시조 할아버지 후손으로만
이어질테니까요.
보통 형제나 친인척 관계에서 많이 들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