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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5

조선시대 도산 서원이라는 곳이 설립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괴거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 존재하였던 곳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더 도산 서원이라는 곳이 설립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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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도산서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에 지어진 서원으로 경북 안동시 도산면(陶山面) 토계리(土溪里)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의 건축물들은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졌으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하고 있다.
    도산서원은 건축물 구성면으로 볼 때 크게 도산서당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분된다.

    도산서당은 퇴계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고,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건립되어 추증된 사당과 서원이다.
    도산서당은 1561년(명종 16)에 설립되었다. 퇴계선생이 낙향 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지었으며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유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한 농운정사도 함께 지어졌다.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되었다.

    1570년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1572년에 선생의 위패를 상덕사(보물 제211호)에 모실 것을 결정하였다. 2년 뒤 지방 유림의 공의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전교당(보물 제210호)과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다. 1575년(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賜額)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총 본산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사림이 월천(月川) 조목(趙穆,1524-1606) 선생을 종향(從享)했다.

    도산서원은 주교육시설을 중심으로 배향공간과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교육시설은 출입문인 진도문(進道門)과 중앙의 전교당(典敎堂)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으로 배열되어 있다. 동.서로 나누어진 광명실(光明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서 오늘날의 도서관에 해당한다. 동.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건물이다.

    동편 도산서당건물을 ‘박약재(博約齋)’와 서편 건물을 ‘홍의재(弘毅齋)’라 하는데 안마당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중앙의 전교당은 강학공간과 원장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재 뒤편으로는 책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자리하고 있다.

    배향공간인 사당 건축물로는 위패를 모셔놓은 상덕사(尙德祠)와 각종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典祀廳)이 있는데 삼문을 경계로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 부속건물로는 서원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상고직사(上庫直舍)가 있으며 이는 홍의재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 입구 왼쪽에는 1970년 설립된 유물전시관 ‘옥진각(玉振閣)’이 있는데, 퇴계선생이 직접 사용했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969년 본 서원을 중심으로 임야 및 전답 19필 324.945㎡이 사적 170호로 지정되었고, 1970년부터 대통령령으로 보수.증축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상의 정신적 고향으로 성역화 되었다. 1977년 도산서원관리사무소가 설치되고 관리운영조례를 제정 공포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도산서원 홈페이지


  • 굉장한비오리121
    굉장한비오리12123.05.25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도산서원(陶山書院)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호계리에 있는 서원. 이황(李滉)이 별세한 지 4년 뒤인 1574년(선조 7)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도산서당(陶山書堂)의 뒤편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75년 선조로부터 한석봉(韓石峰)이 쓴 ‘陶山(도산)’이라는 편액(扁額)을 받았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는 동시에 영남유림의 정신적 중추 구실을 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에 없어지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1969년과 1970년에 정부의 고적 보존정책에 따라 성역화 대상으로 지정되어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기와집으로 된 상덕사에는 이황과 제자 조목(趙穆)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전교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굴도리집으로 되어 있다.

    전사청은 상덕사에 붙어 있는 건물로서 향례(享禮) 때 제수(祭需:제사 음식)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며,

    한존재는 원장의 거실(居室)로 사용하였다.

    각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집으로 된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전교당 앞의 동서편에 있다.

    광명실은 장서고(藏書庫)로서 동서 광명실로 되어 있는데, 1930년에 지은 동광명실에는 이황의 문도를 비롯한

    여러 유학자들의 문집을 모아두었으며, 현재 약 1,300여 종 5,000여 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다.

    장판각에는 이황의 문집, 유묵(遺墨)과 <주서절요(朱書節要)> <이학통론(理學通論)> <계몽전의(啓蒙傳疑)> 등

    여러 판본이 소장되어 있으며, 도산서당은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역락서재는 제자 정사성(鄭士誠)이 처음 학문을 배우러 왔을 때 그의 아버지가 지어준 집이며,

    농운정사는 도산서당과 함께 지은 집으로, 당시에 제자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집이다.

    이 서원은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도산서원 전교당은 보물 제210호,

    도산서원 상덕사 및 정문은 보물 제211호로 지정되어 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이다.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로 우리나라 유학의 길을 정립하면서 백운동서원의 운영, 도산서당의 설립으로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전력하였다.

    -출처:사적안동도산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