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윤석우라는 사람의 내용입니다.
을미사변이 있었던 음력 8월 20일 오후 4시 제1대대장 이두황과 중대장 이범래(李範來)·남만리(南萬里)로부터 야간 훈련을 하라는 명령을 받아 휘하의 병사를 거느리고 동별영(東別營)에서 출발, 태화궁으로 가서 수비하다가 경복 춘생문(春生門)으로 들어가 경복궁 강녕전에 이르러 병사들을 곳곳으로 흩뿌려 보낸 뒤 광화문과 건춘문 주변을 순시하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건청궁 동쪽의 녹산(鹿山) 아래에서 불에 타 형체가 문드러진 명성황후의 시신을 발견했으나, 하사(下士) 이만성(李萬成)에게서 나인의 시체가 불에 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튿날인 21일 궁중에서 전하던 말에, 을미사변이 일어난 때에 명성황후는 파천할 겨를이 없었으며, 피해를 입은 궁녀도 없었다는 것을 듣고 짐짓 지난날 발견했던 불에 탄 시체가 명성황후의 것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그 날 밤 제1대대장 이두황과 제2대대장 우범선에게 보고를 올리니, 우범선이 처음에는 유해를 연못에 던지라고 했지만, 유해의 혼령에 해코지를 당할까 염려되어 타고 남은 유해의 하체를 거둬 모은 뒤 경복궁 후원 서쪽 오운각(五雲閣) 부근 봉우리 아래에 몰래 안치했습니다.
이후 여론이 악화되자 친일정부에 의해 반역을 도모하고 명성황후의 시신을 아무렇게나 안치했다는 이유로 불경죄를 범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에 그해 11월 14일 이주회(李周會), 박선(朴銑)과 더불어 교형에 처해졌습니다.
여론이 나빠지니 친일정권에서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참 구한말은 안타까운 역사가 많습니다. 다시는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할 역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