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검색 이미지
생활꿀팁 이미지
생활꿀팁생활
생활꿀팁 이미지
생활꿀팁생활
따뜻한겨울
따뜻한겨울22.04.07

체스게임의 유래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체스게임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보드 게임이면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보드 게임이라고 들었습니다.

체스게임의 유래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궁금합니다.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자드락비입니다.

    체스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집니다.

    ★ 그리스 장군 팔라메데스가 전술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었다.

    ★ 여왕에게 그녀의 아들이 죽었다는 것을 은유로 보여주기 위해 만들었다.

    ★ 인도 설화 중 두 왕이 철학자들에게 놀이를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운명과 운에 영향을 많이 받는 놀이보다 개인의 의지와 지성이 더 큰 영향을 주는 체스 쪽이 더 인기가 많았다.

    체스는 6세기나 그 이전에 인도의 고대 장기 형식 차투랑가에서 유래되었다.

    고대 인도 장기는 차투랑가와 특이하게도 주사위를 사용해 4명이서 하는 놀이 차투라지 두 종류가 있다. 옛날에는 차투라지가 차투랑가로 변한 뒤 전세계의 체스/장기로 변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차투랑가를 체스의 원조로 있다.

    차투랑가가 페르시아로 전파되면서 샤트란지로 바뀌었고, 차투랑가 또는 샤트란지 단계에서 고대 체스는 동양으로는 중국 장기, 한국 장기, 일본 장기, 몽골 장기, 말레이 장기, 태국 장기, 미얀마 장기로 전파되었다.

    샤트란지는 서쪽으로 아라비아, 남쪽으로 에티오피아에까지 전파되었으며 바로 아라비아에서 이슬람교도들을 통해 스페인으로, 또 동로마인들을 통해 이탈리아로 전해지며 현재의 체스로 바뀌어 유럽 각지로 전파되었다.

    [출처] 체스의 유래|작성자 보드나라여왕님


  • 안녕하세요. JAMESON입니다.

    출처: 대한체스연맹(사단법인) 체스란 입니다

    1. 체스의 기원과 유럽으로의 전파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그 나라 언어를 제대로 배울 수 없듯이 체스의 역사를 알지 못하면 체스를 제대로 이해하고 배울 수 없다.

    체스의 기원은 고대 이집트, 그리스, 중국 기원설 등등 여러 학설이 있으나, 고대 인도의 ‘차투랑가’ (‘차투랑기’로도 발음) 또는 ‘아슈타파’라는 게임에서 오늘날의 체스가 발생했다는 학설이 가장 유력하다. 현재의 체스와 달리 차투랑가는 2개의 주사위를 던져 지정된 기물만 움직였다고 한다. 체스판 생김새도 정사각형이 아닌 십자형이었으며, 4명이 하는 게임으로 마주보는 2명이 같은 편이 되는 팀 게임이었다고 한다.

    고대 인도에서 사랑받던 차투랑가는 인도 북부지역을 정복한 페르시아로도 전파되어 큰 인기를 누린다. 그러던 중 이슬람 율법이 강화되어 모든 도박, 특히 주사위 게임이 전면 금지된다. 하루아침에 재밋거리를 잃은 페르시아인들 가운데 누군가가 주사위 없이 2명이 즐기는 새로운 게임을 차투랑가에서 변형시켜 고안해낸 게임이 ‘샤트랑’(Shatrangj)이다. 이 게임이 서양으로 전파되어 오늘날 체스가 되었으며,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시점에서 체스가 ‘발명’된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페르시아인 가운데 정확히 누가 이 새로운 게임을 고안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에 얽힌 설화는 많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로; ‘새로운 게임’을 발명한 사람에게 페르시아 왕이 상을 내리려 하자 그 사람은 여러 번 사양하고, 그러다 왕이 하도 고집을 피우자 다음과 같은 상을 요구한다. 체스판 첫째 칸에는 조 한 톨, 다음 칸에는 그 두 배인 두 톨, 그 다음 칸은 다시 두 배인 네 톨, 등등 이렇게 체스판 64칸을 다 채워달라고 한다. 그 결과는 다들 아시는 이야기라 생략.

    차투랑가가 페르시아에 전파된 것이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 2인용 게임 샤트랑은 다시 635~651년 사이 페르시아를 정복한 아랍인들을 통해 중동지역 및 북아프리카와 유럽의 발칸반도까지 순식간에 전파된다. 중세기까지 피정복자에서 정복자로 전파되던 체스는 이제 주로 교역루트를 통해 유럽에 전파된다.

    • 1. 북아프리카에서 이베리아 반도를 (지금의 스페인, 포르투갈) 정복했던 무어족을 통해 서유럽으로,

    • 2. 비잔틴 제국을 (동로마제국) 통해 발칸반도를 거쳐 중동부 유럽으로,

    • 3. 코카서스 반도와 카스피해를 건너 러시아 및 동유럽과 중앙아시아로,

    이렇게 크게 3갈래로 유럽에 전파된 체스는 주로 성직자와 왕실 및 귀족층 사이에서 확산된다.

    2. 체스 두는 법과 기물의 변천

    고대인도 사람들이 즐기던 차투랑가는 4명이 각각 킹 1개, 룩(전차) 1개, 나이트(기병) 1개, Aufin(船) 1개, 폰(졸병) 4개, 모두 8개의 기물을 갖고 게임을 시작했다. 페르시아에서 2인용 게임 샤트랑으로 변환될 때 모든 기물의 수가 좌우 대칭으로 2배가 됐지만 킹만은 같은 편에 둘이 존재할 수 없어 Fers(재상)라는 기물이 추가됐다.

    차투랑가의 킹, 룩, 나이트는 근대 체스와 행마법이 동일했으나 Aufin은 오늘날의 비숍과 조금 다르게 대각선으로 2칸씩만 뛰어 넘을 수 있었고, 페르시아인들이 추가시킨 Fers도 지금의 퀸과 달리 대각선으로 1칸씩만 다니는 비교적 약한 기물이었다.

    그 후로 아랍인들은 Aufin을 코끼리(像)로 대체했고, 16세기 중엽 스페인인들은 다시 코끼리를 비숍(주교)으로, Fers는 퀸으로 대체하면서 이들 기물들의 화력을 대폭 늘린다. 비숍은 이제 대각선으로 무한정 달릴 수 있는 장거리 기물로 변신했고 퀸은 직선 대각선 맘껏 달리는 초강력 슈퍼파워가 됐다. 폰이 2칸 전진하는 룰도 추가되면서 스페인 인들의 손을 거친 체스는 고리타분한 장기전에서 초반 1수의 실수에도 체크메이트 당할 수 있는 속전속결의 승부가 됐다. 다혈질의 성질 급한 이베리아인들의 특성이 체스에 베어들었다 할 수 있다.

    체스가 상대방 킹을 잡아먹는 야만적(?) 게임에서 체크메이트를 시키는 기술적이고 신사적인 게임으로 승화시킨 것은 중세 아랍인들이었다. 그 후 체스를 전수 받은 유럽 인들은 기사도 또는 신사도라는 명목 아래 체스의 이런 정신을 이어 왔다.

    3. 세계사를 바꾼 체스의 퀸 : 이사벨라 1세

    사막을 주름잡던 아랍인들은 Aufin(船)을 코끼리로 바꿨고, 가톨릭 스페인인들은 다시 비숍으로 바꿨다. 유럽에서 Fers 대신 퀸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0세기부터이나 그 때는 여전히 Fers와 마찬가지로 대각선으로 한 칸만 다니는 별 볼일 없는 기물이었다. 스페인인들이 Fers를 막강한 퀸으로 바꾼 것은 15~16세기경이었고, 그 배경에 이사벨라 1세를 뺄 수 없다.

    1451년 이베리아반도 북부에 위치한 카스티야(Castilla) 왕국의 후안(Juan) 2세의 늦둥이 막내딸로 태어난다. 이 무렵 이베리아반도는 춘추 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난국에서 점차 기독교 왕국인 북부의 카스티야, 서쪽의 포르투갈, 중부의 아라곤(Aragon), 그리고 남쪽 이슬람교인 발렌시아(Valencia)와 그라나다(Granada)로 통일돼 가고 있었다. 이사벨라가 3살 때 아버지 후안 2세가 사망하고 오빠 엔리케(Henrique) 4세가 등극한다.

    자식이 없었던 엔리케 4세는 어린 동생 이사벨라를 친자식처럼 키우던 중 1468년 일부 귀족들이 반란에 성공, 엔리케 4세를 밀어내고 17살 이사벨라를 허수아비로 왕좌에 앉히려 한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오빠 엔리케 4세가 살아 있는 한 절대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며 오빠를 왕위에 복귀시키고, 동생의 의리에 감명 받은 엔리케는 이사벨라를 공식적으로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한다.

    이들 오누이의 관계는 겨우 1년 만에 악화된다. 오빠 엔리케는 자신의 친 딸과 같은 이사벨라가 정략적으로 포르투갈의 알폰소(Alponso) 5세와 결혼하기를 원했으나, 이사벨라는 아라곤의 왕세자 페르디난트(Ferdinand)와 오빠의 허락 없이 결혼한다. 이에 엔리케는 자신의 늦둥이 딸 후아나(Juana)를 후계자로 앉히고 이사벨라를 쫒아내다시피 한다.

    ‘오빠가 살아있는 한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던 약속을 지킨(?) 이사벨라는 1474년 엔리케가 죽자 아라곤 왕위에 오른 남편 페르디난트의 지원을 받아, 포르투갈을 뒤에 업은 오빠의 딸 후아나를 상대로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를 놓고 한바탕 전쟁을 한다. 1479년 전쟁에서 승리한 이사벨라는 카스티야 왕국을 남편의 아라곤 왕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합병 스페인 왕조를 세우고, 왕비가 아닌 남편과 동등한 위치의 이사벨라 1세 여왕으로서 왕국을 다스렸다.

    이사벨라와 페르디난트가 세운 스페인 왕조는 남쪽 발렌시아와 그라나다 등 서유럽의 마지막 이슬람 왕조들을 멸망시키고 포르투갈을 제외한 이베리아반도를 통일 훗날 거대한 식민지와 무적함대(Armada)를 자랑하게 된다.

    이사벨라 1세는 훗날 다른 일화로 세상에 더 잘 알려진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믿던 콜럼버스는 자신의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한 후원자를 찾아 맨 먼저 포르투갈의 알폰소 5세를 찾아갔으나 거절당한다. 다시 페르디난트와 이사벨라가 있던 스페인 왕실과 정부를 찾아가 후원을 요청하나 또 거절당한다. 힘없이 스페인 왕실을 빠져나오던 콜럼버스를 누군가가 불러 ‘이사벨라 여왕이 사비로 후원하겠으니 바로 떠날 차비를 하라’고 전한다. 이사벨라 여왕은 그 후 스페인 정부가 콜럼버스를 후원하도록 남편과 대신들을 설득하니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여인이라 하겠다.

    4. 활자의 발명과 르네상스

    스페인식의 속전속결 화된 체스는 중세기 말부터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 서유럽에서 기존의 아랍식 샤트랑을 제치고 표준화된 체스로 자리를 잡아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체스는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또 세월이 흐르며 두는 법이 조금씩 변해갔으나, 구텐베르크의 활자 발명과 르네상스는 이런 추세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대량의 인쇄된 서적은 혁신적인 정보혁명을 가져왔고, 이제 많은 사람들이 지역뿐만 아니라 다른 시대에 걸쳐서 같은 정보를 공유하게 됐다. 여러 지역에 걸쳐 제각기 다르던 체스 룰은 점차 그 당시 유럽문화의 중심지였던 프랑스식(=스페인식)으로 (최소한 유럽 내에서) 통일되어갔고, 세월이 흘러도 더 이상 두는 법에 있어 큰 변화가 없었다.

    16세기 무렵부터 스페인의 Lucena, Ruy Lopez와 이탈리아의 Grecco 등 많은 인물들이 체스를 (주로 오프닝을) 연구하고 서적으로 남겨 일부는 지금도 사본이 전해지고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그 무렵 대부분의 저자들이 직접 책을 출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종의 비밀서적으로서 소수의 필사본만 직접 제작하여 고액에 판매하던 것이 활자의 발명과 더불어 불법 제본들이 판을 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전해지는 서적 대부분도 이런 불법 복제 본들이다.

    이런 불법 복제 본들이 저자들에게 금전적인 피해를 입혔는지는 모르나 결과적으로 역사에 그들의 이름을 남기게 했으며 체스의 보급과 활성화에 큰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