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암리 학살사건은 어떤 이유로 일어나게된것인가요?
3.1운동에 관한 영상이나 정보를 보다보면 함께 언급되는것이 제암리학살사건입니다.
3.1운동과 관련이된 사건이라 추측은하는데 정확한 내용을 몰라서 질문드립니다.
제암리학살사건은 어떤 이유로 발생한 사건인가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9년에 3 · 1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면서 제암리에서도 만세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마을 청년을 비롯한 제암리 사람들은 장날을 이용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일본 경찰은 총, 칼을 휘두르고 매질을 하면서 무력으로 진압했지요.
또한 만세 시위 때 주민들에게 저지른 폭력에 대해 사과한다며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제암리 교회로 모이라했고 4월 15일 교회당에 마을 사람들이 모이자, 아리타 도시오 일본 육군 중위를 비롯한 일본군은 교회당 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질렀습니다. 불을 피해 밖으로 빠져나오려는 사람들은 총을 쏘아 죽였고 거기에다 근처에 있는 고주리로 가서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학살했습니다. 제암리 학살 사건으로 30여 명, 고주리 학살 사건으로 40여 명의 주민들이 일본군에게 잔인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제암리에서도 만세 운동이 일어났고 마을 청년을 비롯한 제암리 사람들은 장날을 이용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입니다. 일본 경찰은 총칼을 휘두르고 매질을 하는 등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나 주민들은 이후에도 장날에 만세를 부르고 봉화를 올리는 등 시위를 계속했습니다.
일본의 경찰과 군인들은 4월 5일 있던 만세 시위 때 주민들에게 저지른 폭력에 대해 사과한다며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제암리 교회로 모이라고 했고, 4월 15일 교회당에 마을 사람들이 모이자 아리카 도시오 일본 육군 중위를 비롯한 일본군은 교회당 문을 걸어잠그고 불을 질렀고, 불을 피해 밖으로 나오려는 사람들은 총을 쏘아 죽였습니다.
일본군은 근처에 있는 고주리로 가서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학살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9년 3월 31일 발안장날 시위 당시 군중들의 주재소 습격사건은 4월 15일 향남읍 제암리와 팔탄면 고주리에서 일본이 자행한 보복의 도화선이 되었는데요. 3월 31일, 4월 5일 발안장날 시위와 4월 3일의 화수리·수촌리 시위가 벌어진 후,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발안지역 치안을 맡기 위해 도착한 것은 4월 13일이었습니다. 다른 지역의 시위 주모자들은 2차에 걸친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된 반면, 발안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은 체포되지 않았음을 안 아리타는 제암리를 토벌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제암리 학살 사건(提巖里虐殺事件)은 일제 강점기인 1919년 4월15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 소재 제암리 감리교 감리교회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입니다. 기독교계에서는 "제암리감리교회 사건"으로 부르며, 줄여서 '제암리 사건'이라고도 부릅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9년 3월 1일에 3.1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는데 경기도 화성군 제암리에서도 만세운동을 하게 됩니다. 일제는 4.5일 장날에 제암리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던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에 사과한다면서 4.15일에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한 다음 교회에 불을 질러 죽이고 나온 사람들은 총으로 쏴서 죽이는 천인공로할 만행을 저지른 사건으로 꼭 기억되어야 할 사건입니다.
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제암리 인근 개신교, 천도교 지도자들의 지휘 아래 주민 천여 명이 제암리 발안 장터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일본은 초강경 진압 작전으로 장터 시위에 참여한 마을 주민들을 색출 및 검거를 하고 마을들을 불태웠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제암리 학살사건은 1919년 3월 1일부터 4월 11일 사이에 일본군의 3-1운동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입니다. 제암리는 경상남도 창녕군의 한 마을로, 일본군이 무장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남녀노소를 무참히 살해한 곳입니다. 일제는 제암리에서만 1,500여 명, 3.1운동 전체 기간 동안 7,500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일제의 잔혹한 식민통치와 민족의 독립 의지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얘기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