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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angel
Youangel23.06.04

한명회는 왜 부관참시를당했는지?

안녕하세요? 한명회는 살면서는부귀영화를 다 누리다가 죽어서 다시 목을 베는 부관참시를 당했다고 알고 있는데요 왜 그랬는지 알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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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04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생애 및 활동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불우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글을 읽어서 성취한 바 있었으나 과거에는 늘 실패하였다. 1452년(문종 2) 문음으로 경덕궁직(景德宮直)이 되었다. 이어 어린 단종이 즉위해 김종서(金宗瑞) 등 대신이 집권하자, 친구인 교리(校理) 권람(權擥)의 주선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접근하였다. 그리고 무사 홍달손(洪達孫) 등 30여 명을 추천해 심복을 삼게 하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심복 참모로서 대공을 세워 군기녹사(軍器錄事)가 되고, 정난공신 1등에 책봉된 뒤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에 올랐다. 이듬 해 동부승지,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에 승진되었다. 그 해 가을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에 오르며 우승지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을 좌절시키고, 그들의 주살(誅殺)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승진하였다. 1457년 이조판서에 올라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다.

    1459년황해 · 평안 · 함길 · 강원 등 4도의 체찰사(體察使)를 지내고, 1461년 상당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이듬해 우의정,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영의정에 올랐다.

    권람 · 신숙주(申叔舟) 등과 인척 관계를 맺고 세조 치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1466년 이시애(李施愛)가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신숙주와 함께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신문을 당했으나 혐의가 없어 곧 석방되었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세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원상(院相)주1으로서 서정(庶政)을 결재하였다. 같은 해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에 책록되고, 1469년(예종 1) 다시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책록되고, 영춘추관사로서 최항(崔恒) · 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을 완성하였다. 또한 성종에게 학문을 진흥시킬 방안을 제시했고, 서적이 부족한 성균관의 장서 확충을 위해 경사(經史) 관계의 서적을 많이 인출해 비치하게 하였다. 1484년 70세로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세조 즉위 이래 성종조까지 고관 요직을 두루 역임, 군국 대사에 참여하였다. 특히, 세조는 그를 총애해 “나의 장량(張良)”이라고까지 하였다. 4차례에 걸쳐 1등공신으로 책봉되면서 많은 토지와 노비를 상으로 받아 권세와 부를 누렸다.

    한강 남쪽에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압구(狎鷗)’라 하였다. 명나라 사신이 와서 구경하려 하자 궁중에서만 쓰는 용봉차일(龍鳳遮日)을 쳐서 화려하게 꾸미려 하였다. 그러나 성종이 허락하지 않자 이에 좋지 않은 기색을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무례함이 대간들의 탄핵 대상이 되어 외지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의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 폐사(廢死)에 관련하였다 해 부관참시(剖棺斬屍)주2되었다가 뒤에 신원(伸寃)주3되었다. 세조의 묘정(廟庭)주4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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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이 윤비를 폐비 할때 찬성했던 신하들, 폐비된 윤비에게 사약을 배달한 벼슬아치까지 모조리 찾아내 사형시키거나 부관참시했습니다.

    이때 한명회 역시 갑자사회 때 죄인으로 지목되어 부관참시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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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존의 무오사화가 사림파가 쓴 조의제문이 원인이 되어 사림파가 집중 공격받은 것과 달리 갑자사화는 폐비 윤씨 사사사건이 계기인지라 사림파와 훈구파 둘다 쓸려나갔습니다.



    이에 당시 폐비윤씨의 사사를 찬성하거나 방관한 훈구대신들 중 하나인 한명회 역시 갑자사화 때 죄인으로 지목되어 무덤이 파헤쳐지고 목이 잘려지는 부관참시에 처해진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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