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미술에서 바로크 양식으로 바뀐 이유가 무엇인가요?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미술로 바뀐게 르네상스잖아요.
인간도 중요하다라는 뜻에서 나온게 르네상스라면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바뀐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르네상스 건축물들은 17세기부터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의 유행이 바뀌면서 많이 개축되어 17세기 비엔나를 중심으로 유행하였습니다. 1658년 벌어진 유럽과 아시아의 운명을 건 결전이었던 비엔나 공방전을 승리하여 유럽의 중심이된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시작된 건축 양식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바로크 양식 건축물은 역동적이고 화려한 조각상을 건물의 전면이나 곳곳이 장식해 놓는것이 특징입니다. 또 벽면의 장식이 불규칙적인 곡선과 곡면을 많이 이용해 아주화려하지요.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바로크 매너리즘의 종언과 후기 바로크의 시작
▲ 바로크 매너리즘이란 무엇인가
바로크 매너리즘부터 나가겠습니다. 17세기 상황이 바로크라는 독립적인 양식을 만들어 낸 반면 16세기의 연속이라는 범위 내에 머문 건축가들도 많다는 겁니다.그러나 연속이라고 해서 똑같은 것이 아니라 17세기 상황이 더해져 변형된 거지요. 16세기는 매너리즘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되 바로크의 영향이 더해져서 바로크 매너리즘이라는 말로 부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건축가들로는 로마의 라이날디(Rainaldi) 부자가 있죠. 아버지는 지롤라모 라이날디입니다. 이름이 좀 이상하죠.
그림을 보시면 이것이 지롤라모의 대표작입니다. 어휘들이 문법 체계가 맞지 않아요. 상인방 위에 다시 오더가 아니고 주신도 아닌 이상한 부재가 하나 올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큰 윈도 프레임이 올라가 있죠.
평면에서도 보면 그리크로스도 아니고 단일 바실리카도 아니고 애매하죠. 공간이 사면으로 확장되면서 중앙 집중형과 선형공간이 합쳐지면서 단일 사각형을 몸통으로 확장해 갑니다.
공간이 분할되면서 선형성을 추구하고 있죠. 전혀 어느 족보에도 없는 새로운 구성이라는 겁니다. 지롤라모는 그렇게 유명한 건축가는 아니었죠. 그 아들 카를로 라이날디가 더 유명한 건축가가 됩니다.
아버지의 것을 기본윤곽을 받아들여서 복잡하게 분할시킵니다. 이런 기법이 파라디오의 교회에서 많이 쓰던 것 중의 하나이죠. 팔라디오는 정통 고전주의를 추구하면서도 매너리즘의 기법을 보이죠.
그 다음에 평면의 벽채와 기둥의 관계가 애매합니다. 기본적으로 벽채 구조이기는 한데 기둥이 보통 평상적인 반원형 벽기둥보다는 독립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완벽한 독립 원형기둥이라고 보기에는 그 역할이 애매하다는 겁니다.
결국은 벽이 그런 것을 하고 있고 벽에 붙어 있기는 한데 기능을 하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종속된 것도 아니고 또 완전히 독립된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 중간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로크적인 요동치는 벽면, 곡면의 효과를 강조하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매너리즘적인 애매함으로 볼 수 있죠.
입면 641을 보면 거리 확보가 안 돼서 좁습니다. 출입구가 여러 겹입니다. 2층을 보면 출입구 하나만으로 완결된 상태인데도 그 위에 윤곽을 하나 더 쌌습니다. 이것은 미켈란젤로가 즐겨 쓰던 기법이죠.
일단은 여러 가지 공간 성격이나 부재의 기능이 애매하고 실제로 팔라디오나 미켈란젤로 같은 매너리즘 건축가들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라이날디의 기법입니다.
그 다음 롱기(Longhi)의 건물, 643입니다. 이것은 기둥으로 유명합니다. 기둥을 과도하게 사용하지요. 이것은 기둥이 무의미하게 많습니다. 마데르노의 기법도 아니지요. 마데르노에다가 페루치를 합해 놓았다고 볼 수 있죠.
그 다음에 중요한 건축가가 베네치아의 롱게나(Longhena)이지요. 베네치아는 조금 독특한 도시이지요. 워낙 운하가 많지요. 사이트가 불규칙합니다. 직각으로 나오는 것이 없을 정도로 비정형이 많습니다.
그래서 비정형 경향, 장식들이 항상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곳이지요. 그래서 오히려 바로크가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어서 바로크 건축이 나타나지 못한 역설이 성립되는 도시입니다.
팔라디오까지 매너리즘은 굉장히 많이 융성을 많이 했는데 바로크는 크게 융성하지 못했습니다. 그 가운데에 유일하게 롱게나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647에서 649를 남깁니다.
평면을 보면 중앙 집중성이 극도로 강조되었죠. 그러면서 라베나에 있는 비잔틴 교회를 선례로 삼습니다. 그것과 비교해 보면 굉장히 유사한 것을 알 수 있죠. 비잔틴, 중앙 집중형. 이런 것들이 전부 매너리즘적인 배경이죠.
가톨릭이 다시 중심으로 들어온 바로크 시대에는 생각하기 힘든 경향이죠. 구체적인 외관 처리를 봅시다. 팔각형인데 한 쪽은 큰 출입구이고 뒤쪽으로 다른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죠.
결국 눈에 보이는 것은 일곱 면인데요. 647을 보면 정면 출입구 파사드는 신전 파사드인데 조금 높고요. 나머지 일곱 면은 조금 낮은 신전 파사드입니다. 649에서는 왼쪽 부분이 중앙 출입구입니다.
중앙 출입구의 신전 파사드는 개선 아치 모티프를 사용했습니다. 팔라디오가 빌라 파사드에서 많이 쓰던 어휘들입니다. 여기에다가 출입구 부분은 개선문의 로마 고전주의, 나머지 여섯 면은 셋으로 나눈 삼분할창. 이것을 로마 목욕탕에서 많이 쓰던 창들입니다.
저렇게 팔라디오의 선례를 많이 사용한 점이 매너리즘적인 것으로 볼 수 있죠. 바로크적인 경향은 돔의 드럼에서 나타납니다. 소용돌이 문양의 부벽을 buttress로 받치고 있습니다.
부벽은 고딕이며 여성성을 상징하죠.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이 건물은 흑사병이 물러난 것을 감사하며 지은 봉헌교회입니다. Votive church라는 것이 있는데요. 성모 마리아의 자비로 인해서 흑사병을 물리쳤다고 믿으면서 그것을 찬양하는 거죠.
성모 마리아의 상징성이 강한 건물이죠. 고전적인 상징성이죠. 저런 것들이 바로크 매너리즘의 대표 경향이라는 겁니다.
▲ 후기 바로크의 시작, 삐에드몽과 폰타나그 다음 후기 바로크로 넘어갑니다. 상황들이 많이 바뀌게 됩니다. 이탈리의 후기 바로크는 지역적으로는 로마와 남부, 남부는 나폴리와 시칠리아. 북부는 베네치아. 아까도 얘기했지만 북부는 원래 바로크적이었기 때문에 어떤 양식으로서의 바로크가 융성하기는 어려웠죠.
조각장식 등을 중심으로 바로크 건축이 일정 부분 나타났죠. 삐에드몽 지방은 토리노쪽에 있는 도시인데요. 이탈리아 반도가 이렇게 있으면 베네치아가 있고 유명한 여러 도시들이 거의 다 같은 위도 상에 있습니다.
각각 알프스 너머의 지역을 상대하는 도시인데요. 여기도 조그만 도시들이 있는데 서북쪽에선 마지막에 있는 큰 도시이지요. 이 지방을 Piedmont 지방이라고 합니다.
알프스 기슭이라 지중해의 반도 지역과는 많이 다릅니다. 밀라노도 마찬가지지요. 여기는 정치적으로 보면 스위스, 프랑스와 연계가 강하고 자연적으로 보면 알프스 기슭 아래로 상당히 목가적인 분위기이죠.
그러면서 기후도 비교적 뚜렷한 사계절이 있죠. 겨울도 만이 안 춥지만 눈을 보입니다. 사계절이 반도보다는 비교적 뚜렷하죠. 이런 여러 특징으로 인해서 이탈리아 내에선 특별한 지역이라는 겁니다.
최근에 온난화로 기후 변화가 심해지면서 남부는 홍수인데 서울은 햇빛 나기도 하죠. 일상이 지루하면 일기예보 할 때 중강진을 보세요. 거기는 겨울에 영하 28도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 그렇게 재미있어요.
부산 제주도는 해봤자 영하 1도인데 거기는 영하 28입니다. 물론 북쪽 땅입니다. 신의주 부근이죠. 우리나라도 반도라 아래와 위가 굉장히 다른 거죠. 이탈리아도 그런 겁니다.
아무튼 이 지역 중에 건축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지역은 로마와 삐에드몽 지방이라는겁니다.
로마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쇠퇴기에 접어듭니다. 그러나 부자는 망해도 삼대를 간다고 했듯이 로마가 처음 망했던 이후로 계속 굴곡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르네상스 때 부흥하다가 이때 다시 몰락합니다.
거시적으로 보면 문명 중심이 알프스 이북으로 이동하는 겁니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부이죠. 이때가 후기 바로크입니다. 루이 14세도 나오는 겁니다. 프랑스가 유럽의 중심지가 되고 대서양,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등에서 식민지 약탈을 시작하죠.
부가 편중되면서 대서양시대로 넘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기독교는 급격히 쇠퇴하죠. 18세기에 오면 중첩이 되는 겁니다. 바로크 시기가 18세기 전반부까지 가는 것이죠. 그러나 이미 계몽주의 건축이 프랑스를 중심으로 시작이 되는 겁니다.
계몽주의부터는 현대건축에서 배우게 되는 겁니다. 상당히 뒤늦은 겁니다. 로마와 그곳을 중심으로 한 로마 고전주의의 끝자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나타나는 것은 뭡니까. 로마가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로마의 후기 바로크 건축은 아케데미즘으로 통일이 됩니다.
이때 오게 되면 로마는 더 이상 창조적인 건축가가 나오지 않습니다. 창조성은 삐에드몽으로 넘어가게 되지요. 그것은 프랑스로 넘어가는 길목이므로 삐에드몽이 권력의 중심부로 떠오르게 된다는 겁니다.
권력이 반도 중심에서 점점 위로 넘어가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죠. 카를로 폰타나라는 사람이 앞에 있었던 천 육칠백년 되는 고전주의를 종합화합니다. 그래서 산 루카 아카데미라는 것을 세웁니다.
이것은 건축만 한 것은 아니고 회화도 같이 하면서 교황을 필두로 유력 가문들의 도움을 받아 설립됩니다. 근대 아카데미의 효시라고 할 수 있죠. 창작이 안 되니까 과외로 살겠다는 거지요.
중요한 이유는 르네상스 매너리즘, 바로크를 거치면서 수많은 건축가가 배출이 됐잖아요. 그들의 도면 등을 모두 모아놓는 겁니다. 도서관이죠. 이것이 굉장히 큰 업적으로 남습니다. 비록 창조적 에너지는 없었지만 말입니다.
폰타나도 작품은 많이 남겼지만 훌륭한 건축가는 아니었는데 저 작업을 한 것이 평가를 받습니다. 산 루카 아카데미는 알프스 이북 지역에 후기 바로크나 계몽주의를 이끌어 갔던 주요 건축가들이 거의 다 거쳐 갑니다.
폰타나의 문하생이 되는 거죠. 저것이 바로 로마만이 할 수 있는 거죠. 건축은 어차피 훌륭한 건물을 만들어 내는 분야니까 창작이 제일 일순위이지요.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저런 식의 종합화 경향, 아카데미즘의 창시가 상당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질 수가 있다는 말이죠.
폰타나 개인의 작품을 보죠. 그림 657, 658입니다. 전형적인 종합화이죠. 일단은 오더 시스템을 이용한 마데르노 어휘, 곡면은 밀라노 초기 바로크에서 보로미니로 이어지는 측면이죠.
반면 출입문의 장경주의 기법은 베르니니의 기법이죠. 혹은 기둥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면 마데르노의 기법으로 볼 수도 있고 롱기의 것으로도 볼 수 있죠. 출입구의 전체적인 장경주의 기법은 베르니니의 것인데요.
658을 보면 644와 유사합니다. 출입구를 여러 겹 싸는 것은 지롤라모 라이날디의 바로크 매너리즘을 이어받은 거죠. 이런 식으로 앞의 여러 경향들을 종합합니다. 바로크는 건축가 이름과 건물 이름을 잘 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큰 흐름은 앉아서 들으면 이해가 되죠. 나중에도 대강 기억해서 쓸 수 있죠. 그러나 구체적인 실례들을 많이 알아야 합니다. 중간고사 때도 보니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서 못 쓴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바로크 시대 때 건축가들의 이름이 비슷해서 어렵습니다. 외우는 게 필요합니다. 칼로 폰타나가 이런 식으로 로마 후기 바로크를 이끌어 가는 건축가가 되었다는 겁니다.
▲ 삐에드몽 지방의 세 건축가그 다음 후기 바로크의 건물을 중심으로 보면 삐에드몽 지방이 압도적으로 중요합니다. 역기서도 세 명이 특히 중요합니다.
구아리니(Guarini) ,주바라(Juvarra), 비토네(Vittone)가 연달아 등장합니다. 삐에드몽 지방이 새로운 공화국으로 커지면서 야심가가 등장합니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입니다. 이 앞뒤로 해서 이 지방이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도시국가인데요. 자국의 전통적 건축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아리니와 주바라는 외부에서 데려온 경우입니다. 비토네는 삐에드몽 사람입니다. 이렇게 족보가 이어집니다.
구아리니는 17세기 사람으로 연도로 보면 성기 바로크로 구분할 수 있는데 건축 경향으로는 후기 바로크로 보는 게 맞습니다. 삐에드몽 지방의 후기 바로크의 문을 연 중요한 사람이고 17세기 전체를 통틀어도 베르니니와 보로미니에 견주어서 뒤떨어지지 않는 창작력을 보인 사람입니다.
활동 법위가 굉장히 넓어서 오스트리아에서부터 파리까지, 영국만 빼고 거의 온 유럽을 누비고 다닌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특이하게 성직자인 동시에 수학자였습니다. 초기 근대기의 3대 건축가상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사람이죠.
테아틴 수도회 소속이었습니다. 이들은 가톨릭 개혁운동을 목적으로 극기주의, 순결, 복종, 청빈 등의 핵심강령들을 내걸고 부패한 가톨릭을 내부로부터 개혁하자고 합니다.
구아리니는 집안 전체가 이 수도회 소속이고 처음에는 그 이력을 성직자로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수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이런 환경이 건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아리니는 교회 건물이 많습니다. 대부분 이 수도회 소속 교회이지요. 테아틴 수도회는 자신의 소속 건축가에게만 일을 맡기는 텃세가 심한 폐쇄적인 곳이었습니다.
교회를 설계할 만한 사람이 이 사람 외에는 없었지요. 다행히도 구아리니가 천재성을 발휘해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죠. 또한 수학자였기 때문에 기하작도에 굉장히 관심을 보이며 자유분방한 작품의 밑바탕이 됩니다.
출처:네이버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안녕하세요. 박정욱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는 서로 다른 미술 양식으로,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의 변화는 여러 가지 요인에 기인합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변화는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요소들의 조합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종교적 변화와 반영: 16세기 유럽은 종교 개혁 운동과 교회 분열로 인한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습니다. 르네상스 미술은 그리스 로마 고전주의를 강조하고 신화적, 인간 중심의 테마를 다뤘습니다. 하지만 바로크 시기에는 교회의 영향력이 커져 신성성과 스승의 권위, 신비성이 강조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바로크 미술은 정교한 상징성과 종교적 감정을 강조하는 특징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정치와 사회적 변화: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는 도시 국가들의 경제와 문화적 번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크 시기에는 유럽 전역에서 국가의 통합과 중앙집권화가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권력과 예술의 중심이 변화하였습니다.
감성과 표현의 변화: 바로크 미술은 르네상스의 이성적이고 조형적인 표현을 넘어서 감성적이고 역동적인 표현을 추구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광원, 움직임, 드라마틱한 표현이 강조되었습니다.
예술가의 개인적 특성과 발전: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고전적인 이상과 실재의 조화, 대상의 관찰을 중요시했습니다. 그러나 바로크 예술가들은 자신의 내면과 개인적 경험을 더 많이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이로 인해 작품의 표현력과 정서적 내용이 다양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요인들이 결합하여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의 변화가 일어났고, 이는 미술의 스타일과 테마, 감정적 표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안녕하세요.조사를 해본 결과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바뀐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종교개혁과 가톨릭의 대응
르네상스 시대에는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가톨릭 교회가 위기를 맞았습니다. 종교개혁은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억압에 반발하여 일어난 운동으로, 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약화시켰습니다.
이에 가톨릭 교회는 바로크 미술을 통해 종교적 권위와 위상을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바로크 미술은 화려하고 극적인 표현을 통해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가톨릭 교회가 추구하는 종교적 감흥을 표현하는 데 적합했습니다.
신흥 부르주아의 등장
르네상스 시대에는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했습니다. 신흥 부르주아 계급은 부유하고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르네상스 미술은 고전 정신과 인문주의를 바탕으로 한 인간 중심의 미술이었습니다. 이러한 미술은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세속적인 가치관에 부합했습니다.
과학 기술의 발전
르네상스 시대에는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화했습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켜 주었고, 인간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바로크 미술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여, 더 역동적이고 현실적인 표현을 추구했습니다. 바로크 미술가들은 빛과 그림자, 원근법, 명암법 등을 사용하여 깊이감과 공간감을 표현하고, 인간의 감정과 감각을 자극하는 극적인 효과를 연출했습니다. 참고 하셔서 도움되셨다면 추천 좋아요 부탁드려요~ 좋은 하루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