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15대 미천왕의 생애에 대해 궁금합니다.
큰아버지에게 쫓겨 소금장수도 하며 결국 왕이 되었다고 하는데 상당한 우여곡절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정확히 어떠한 역사적 삶을 살고 왕으로써의 업적은 어땟는지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고구려의 을불은 어린 날 큰 아버지인 봉상왕이 동생인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마져 죽이려하자 궁을 빠져 나왔습니다. 남의 집에서 머슴을 살다가 결국은 견디지 못해 1년 반 만에 뛰쳐나왔고 다시 동촌 사람인 재모와 더불어 배를 타고 압록강을 오르내리며 소금장수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못된 노파를 만나 결국은 관에 끌려가 매를 맞고 나오기도 하였지요. 이렇게 극심한 고생을 하면서 몇 년을 숨어 지냈습니다. 그런데 봉상왕이 포악하고 실정을 거듭하자 신하들은 왕을 가두고 을불을 모셔 온 후에 국새를 올리고 왕위에 오르길 간청했습니다. 그 을불이 바로 고구려 15대 미천왕입니다.
인간의 가치관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자기가 겪었던 경험, 얻은 지식의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미천왕은 302년 9월에는 3만의 군사를 이끌고 만주지방의 현도군을 공격하여 8천 명의 적을 사로잡았습니다. 311년 8월에는 요동의 관문인 서안평을 공격하여 점령하게 되며, 313년에는 낙랑군을 공격하여 2천여 명의 적을 포로로 잡고, 314년에는 대방군을 공격해 중국군현을 한반도에서 몰아냄으로써 압록강에서 서해까지 진출하여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고 국가 기틀을 마련하게 됩니다.
<업적요약>
압록강 하류 지역인 서안평 점령(331년).
낙랑군 및 대방군 축출 : 고조선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으며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한반도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313년,314년)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서안평 점령 : 5호 16국 시대의 혼란기에 압록강 하류 지역인 서안평 점령(311).
낙랑군 및 대방군 축출 : 고조선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으며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한반도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313~314).
안녕하세요. 이홍휴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유소년기에는 소금장사를 하였고 을불을 왕으로 옹립해 새로운 태왕으로 즉위하고 엄청난 영토를 확장했다고합니다.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미천왕은 고려 15대 왕입니다.
초기 고구려에는 힘센 5부족이 있었다. 왕위는 소노부에서 배출되다가, 계루부로 교체되기도 했다. 하지만, 차츰 계루부의 힘이 커져, 다른 부족에서 넘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이제 왕위는 계루부 왕실 내에서 다투게 되었다.
248년 12대 중천왕의 두 동생 예물과 사구가 반란을 일으키다가 죽임을 당한 일이 벌어졌다. 임금에게 동생이란 언제든지 자신의 왕위를 넘볼 수 있는 경쟁자이기도 했다.
왕이 자신의 동생을 죽인 사건은 세계 역사에서 자주 있던 일이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는 중천왕 시기만이 아니라, 그 아들인 서천왕 시기인 286년에도 왕의 동생인 일우와 소발의 반란 모의 사건이 벌어졌다.
서천왕은 이 계획을 미리 알고, 동생들을 잡아 죽여 버렸다. 연이어 터진 반란 사건은 서천왕의 아들인 상부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어릴 적부터 교만하고 의심이 많은 인물로 성장했다.292년 서천왕이 죽자, 상부가 왕위를 계승하여 14대 봉상왕이 되었다. 봉상왕은 가장 먼저 작은 아버지인 안국군 달가를 의심했다. 달가는 280년 숙신족과 전쟁에서 승리한 명장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왕실에서도 영향력이 큰 인물인 만큼 그에게는 두려운 정치적 라이벌인 셈이었다. 봉상왕은 즉위 후 불과 몇 달도 되지 않아 사람을 시켜 달가를 죽여 버렸다.
봉상왕은 한 걸음 더 나가 자신의 동생인 돌고가 반역의 마음을 품었다고 죽였다. 왕의 동생이 연이어 3대째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돌고의 아들인 을불은 살아남기 위해 몰래 궁궐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그뒤 소금장수 일도 하고, 도둑을 몰리기도 하고 굉장하 어려움이 있었지만,
왕의 계속된 실정으로 국상인 창조리가 봉상왕을 폐위시키고, 을불을 왕으로 세워 15대 미천왕이 됩니다.
왕이 되자 영토를 넓히는데 힘쓸뿐 아니라 자기가 친히 어려운 생활을 격어 봤었기에 백성들을 좀더 살기 좋게 하기 위해 힘썼다.
출처 : 인물한국사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미천왕은 성 고씨이고 이름 을불, 우불 이며 서천왕의 손자, 고추가 돌고의 아들입니다.
호양왕이라고도 하며 큰아버지 봉상왕이 아버지를 죽일 때 민가에 숨어 화를 면하고 소금장수 등을 하며 지냈습니다.
뒤에 국상 창조리 등이 봉상왕을 폐하자 왕위에 올랐고 국토 확장에 진력하여 302년 군사 3만으로 현도군을 공격, 적군 8000명을 사로잡았습니다.
311년 요동 서안평을 점령하였고 313년 낙랑군을 공략하여 적군 1000명을 사로잡아 낙랑군이 멸망하게 되고 314년 대방군을 정벌하여 영토로 삼았습니다.
당시에는 요동지역을 지배해 오던 진의 통제력이 약해지며 선비족의 일파인 모용부가 세력을 확장하였고, 고구려는 영토확장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이들과 자주 충돌하여 고구려는 진의 평주사자 최비 등과 연합하여 모용부를 공격하고자하나 실패하고 요동지역은 모용부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미천왕은 그 이후에도 요동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모용부를 공격하나 실패했습니다.
미천왕은 죽은 뒤 미천지원에 묻혔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삼국시대 고구려 제15대(재위:300~330) 왕. 미천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15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300~331년이다. 서천왕의 손자로 아버지가 봉상왕에 의해 반역혐의로 죽임을 당하자 피신해 소금장수를 하며 살다가 봉상왕 폐위 후 국상 창조리 등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