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순과 진궁은 왜 사이가 안좋았나요?
여포에게 과분한 장수라고 평가되는 충성스럽고 능력도 있던 고순과 모사로서 유능했던 진궁은 서로 사이가 좋지않았다고하는데 이 둘이 반목했던 이유가 무엇때문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자신의 아들과 같이 대했으며, 진궁을 죽이고 난 뒤에도 그의 가족들을 보살펴 주는 모습을 보자면 조조가 진궁에게 걸었던 신뢰감은 꽤 컸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단지, 군신관계라고 보기에는 이런 기록들의 존재는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럼 진궁은 이렇게 유수한 대접을 받으면서도 다른 생각을 품게 된 것일까. 그 이유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말들이 많다. 개인적인 사견으로 세 가지 이유를 들어서 표현해 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 질투심이다. 첫 번째 이유에 관해서 질투심이 뭐냐고 황당해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질투심이란 건, 당시 조조의 아래에 있던 순욱과 정욱이란 뛰어난 인물들의 질투심을 뜻하는 것이다. 이에 관한 기록은 직접적으로 찾을 수 없었기에 현재 출간된 서적에서 그 근거를 찾아보았다.
‘진궁은 조조군 제일의 참모임을 자부하고 있었으므로 신참 순욱, 정욱 등에 대한 질투심이 있었고 또한 서주에서 조조가 벌인 대량학살에 대해 실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삼국지 인물사전 중에서>
당시 새롭게 치고 올라오는 이들의 존재는 훗날 그들의 활약상을 보아도 얼마나 위협적이었을 지는 다들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만큼 그들의 능력은 뛰어나다고 밖에 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들의 능력에 따른 진궁의 질투심은 그의 반란 요인에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며, 오히려 자신의 배반이 이들에게는 조조의 신임과 능력을 확인받는 크나큰 기회가 되는 역작용을 일으킬지는 그가 어찌 알았겠는가. 이 두 사람이 세 성을 지켜냄으로써 조조를 완벽한 궁지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위치를 위협하던 이들의 존재를 오히려 자신의 행동으로 돋보이게 만들어주다니, 어찌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 실망감이다. 실망감이란 것은 진궁 자신이 조조에게 걸고 있던 기대에 비해 조조의 행동이 그를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궁은 처음 연주를 받칠 때에도 조조의 능력을 찬양하면서 주위의 권세 있는 인물들을 설득해 나갔다. 그것은 그가 조조에게 거는 기대가 보통 이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모습을 알아챈 나관중 역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비슷한 장면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여백사 사건이다. 나관중은 진궁이란 인물이 조조에게 실망하는 과정을 이 여백사 과정으로 표현해 내는데 그 사건을 보고 있자면, 실제 진궁의 행동과 일치하는 바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큰 기대를 걸고 그를 구해주는 모습은 진궁이 연주를 조조에게 받치는 모습. 이후 조조가 여백사를 죽이는 모습과 그가 하는 말을 듣고는 몰래 조조의 떠나는 모습은 그가 주위 세력과 모의하여 조조를 배반하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 자 그럼 연의에서 그가 조조에게 실망한 여백사를 죽이는 것과 일치하는 역사의 사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래의 기록들로써 알 수 있다.
‘전 구강태수 진류인 변양(邊讓)이 일찍이 조조를 기롱(譏弄)한 적이 있었다. 조조가 이 애기를 전해 듣고 그와 그의 처자식을 죽이자 평소 변양의 재주와 명성을 높이 산 연주의 사대부들은 조조를 매우 두려워하게 되었다.’
‘진궁은 조조군 제일의 참모임을 자부하고 있었으므로 신참 순욱, 정욱 등에 대한 질투심이 있었고 또한 서주에서 조조가 벌인 대량학살에 대해 실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삼국지 인물사전 중에서>
위 사건들은 진궁이 조조를 섬기는 동안 있었던 일이다. 첫 번째 사건은 진궁과 더불어 연주의 사대부들에게 충분히 반감을 조성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물론, 이 사건이 있었기에 그들은 진궁과 장막의 반란에 그렇게 쉽게 동조하여 일어났었던 것일 수도 있다. 두 번째 서주 대학살 사건은 조조의 일생 중에서도 오점 중에 오점으로 꼽히는 사건이다. 특히, 이 사건의 잔학성은 충분히 한 인물에게 걸었던 기대감을 산산조각 파괴하고도 남을 정도이기에 진궁 역시 자신이 도와주고 기대했던 인물에 대한 실망감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일 수도 있다. 그 근거로 자치통감을 쓴 사마광은 진궁의 반란 부분을 언급하는 구절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진궁(陳宮)은 성정이 강직하고 장렬(壯烈)했다. 내심 스스로 의구심이 일어 종사중랑(從事中郞) 허사(許汜)와 왕해(王楷), 장막의 동생 장초(張超) 등과 함께 조조를 배반하기로 공모했다.’ <자치통감 중에서>
의구심이 일어났다. 이것은 그의 마음이 조조에 대한 실망감으로 번지고 있는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본다.
세 번째, 본성이다. 본성이란 것은 진궁이란 인물의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그가 조조를 섬긴 지 2년 만에 배반을 한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기록이다. 하지만 그가 여포의 편에서도 한번 배반을 시도했던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기록은 아닐 것이다.
‘<영웅기>의 기록에 따르면 '196년 6월, 부하 학맹이 원술과 내통하여 여포에게 반란을 일으켰을 때 진궁이 공모하고 있었던 사실이 발각되었다 '<삼국지 인물사전>
어찌 보면, 진궁이란 이는 그가 섬긴 주군이 자신의 기대에 못 미쳤기에 배반을 행한 것일 수도 있다. 허나, 이렇듯 쉽게 2년에 한번씩 사건을 일으킨 다는 것은 그를 만족 시킬만한 군주들이 과연 얼마나 뛰어나야 할지 새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그 역시 인간이기에, 자신이 선택한 군주의 기대감에 관한 욕심은 아주 클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렇듯 실망감을 크게 느끼며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의 생각은 너무 큰 군주를 원하고 있으며, 자신의 입맛에 딱 맞는 군주만을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는 평생 살아갔었더라도 자신이 평생 모실 군주를 찾지 못할 그런 인물이 아니었을까. 너무 이상만을 쫓아다닌 인물이 아니었을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그 본성이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인간의 욕심을 그대로 표출해내고 있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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