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삼국지중 어떤 주요 저자가있는 작품이 있나요
국냉서 삼국지를 소설, 만화로 그린 저자로는 이문열, 박종화(월탄), 김홍신, 황석영, 박태원, 김구용, 정비석 등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월탄 삼국지는 1968년 초판으로 장기간 사랑받았으며, 고전적 필치와 묘사가 특징입니다. 이문열의 삼국지는 대중적 인기를 누려 무려 1700만부가 팔렸습니다.
평가
응원하기
삼국지의 시기가 정확히 언제를 말하는건가요
삼국지의 시대적 배경은 서기 220년 위가 건국되고 280년 진이 오를 멸망시켜 삼국을 통일한 시기까지입니다. 220년 조비가 한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으며 시작됩니다. 정사 <삼국지>와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와 만화 <삼국지> 등에서 흔히 다루는 삼국지는 서기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시기부터 다루나 엄밀하게 삼국 시대는 220년부터입니다.
평가
응원하기
송나라의 강남유역이 어떤곳이길래 그렇게 부자도시였나요?
송나라 시대 강남 유역이 부자의 도시였던 것은 비옥한 농경지가 풍부했기 때문입니다. 양쯔강 유역은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수자원으로 농경에 유리했습니다. 특히 송나라 때는 참파벼가 도입되어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인구가 급증하고 세금 수입이 크게 늘었습니다. 게다가 화북을 잃은 송나라가 임안(항저우)로 천도하면서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송나라는 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해상 무역을 활발하게 했고, 강남 지역을 중시으로 중국과 주변 국가 간 무역이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강남이 풍족하면 천하가 태평한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평가
응원하기
고려의 청야 전술은 어떤 것을 의미하나요
고려의 청야 전술은 적군이 공격해 올 때 주변 들판의 곡식 등 군량미를 미리 거두어들이거나 불태우는 등 빈 들판으로 만들어 적군이 현지에서 식량을 보급받지 못하도록 하는 전술입니다. 전술은 적군의 보급을 차단하여 전투력을 약화시키고 피로를 누적시킨 뒤 반격하는 방어적 전술로, 고려 현종이 거란(여진)군과의 전쟁에서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구체적으로 적이 물자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서는 고구려 때부터 사용해 왔던 전술입니다.
평가
응원하기
세종대왕은 형들과 우애가 깊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종 대왕이 형들과 우애가 깊었던 것은 폐위된 형 양녕대군이 계속해서 아끼고 보호하려 하였습니다. 신하들이 양녕대군 문제를 거론하며 압박할 때에도 골육지친이니 버릴 수 없다고 형을 감쌌습니다. 그리고 둘째형인 효령은 출가하여 정계에 간섭하지 않았습니다.그리고 세종의 개인적 인격과 통치 방식이 화목과 이해를 중시해서 형제들 간에 정치적 경쟁이 줄이고 우애를 유지하도록 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평가
응원하기
러시아의 칸과 짜르가 무슨뜻인지 궁금합니다
"칸"은 주로 유목민 출신의 군주 칭호로 몽골과 튀르크 계열의 유목민 국가들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러시아의 경우 모스크바 공국이 킵차크 칸국 영토 일부를 장악하면서 칸은 주로 유목민 전통과 중앙아시아, 동유럽 초원 지역에서 강력한 군주를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그리고 차르는 러시아 군주의 칭호로 라틴어의 카이사르에서 유래됩니다. 이 칭호는 동슬라브권에서 황제, 혹은 왕에 해당됩니다. 이반 4세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해, 1721년 표트르 대제 이후에는 공식 황제 임페라토르(Imperator) 칭호로 대체되었지만 관습적으로 계속 쓰였습니다.
평가
응원하기
조선왕릉이 상대적므로 도굴 피해가 적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조선왕릉의 지하에는 왕의 시신을 모시는 견고한 석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석실을 둘러싼 회벽은 시멘트와 비슷한 성분으로 만들어져 콘트리트보다 더 단단하게 하였습니다. 부장품이 적고 검소한 장례문화도 도굴꾼들의 관심에서 벗어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는 능참봉을 두고 재실과 수복방 등 왕릉 관리 시설을 운영하여 왕릉을 체계적으로 보호했습니다. 따라서 조선시대 왕릉은 도굴 위험 자체가 낮았고, 도굴꾼들이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뚫을 이유가 적었습니다임진왜란 때 성종과 중종릉을 도굴하려 한 사례가 있지만 대부분의 왕릉은 지나치게 견고해 도굴이 실패하여 큰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평가
응원하기
조선왕릉에는 주로 어떤것들을 같이 묻었나요
조선왕릉에는 주로 왕과 왕비의 시신을 모신 견고한 석실에 백자, 칠기함, 금속과 석재로 만든 석물 등이 있었고, 제사용 제구들도 함께 포함되었습니다. 능실 내부에는 사신도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재궁이 두꺼운 석회로 감싸져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조선은 검소한 유교적 장례 문화로 부장품의 수와 진귀한 장신구 대신 기능적이고 절제된 형태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즉 많은 보물은 거의 함께 묻히지 않았습니다.
평가
응원하기
이집트 신왕국시절에는 무덤 도굴을 막기위해서 어떤 대비를 했나요
이집트 신왕국 시대에는 무덤 도굴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대비를 했습니다. 무덤 위치를 일부러 외진 골짜기, 특히 왕가의 계곡에 조성하였습니다. 이곳은 후미진 산속 깊은 곳에 무덤들이 모여 있는데, 눈에 잘 띄지 않도록 설계되었습니다. 피라미드를 짓지 않고, 수직 갱도와 여러 복잡한 지하 통로로 무덤 구조를 만들어 도굴꾼들의 접근을 어렵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덤 내부의 관이나 유물을 숨기는 여러 방법과 함께, 무덤 벽에 저주 문구를 새겨 도굴꾼들에게 경고하는 관습도 있었습니다,
평가
응원하기
이슬람국가에서도 과거 여왕이 즉위한 사례가 있나요
이슬람 국가에서도 다수 지역에서 역사적으로 여성 군주가 있었습니다. <코란>에도 찬양받은 시바의 여왕은 고대 무슬림 세계에서 여왕으로크게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1607년부터 1138년까지 예멘을 다스린 여성 통치자인 아르와 알-술라이가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이 금요일 예배 시 기도에 거론될 정도로 존경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13세기 인도의 델리 술탄의 라지아 술타나는 1236년부투 1239년까지 통치한 여성 술탄입니다.
평가
응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