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조선시대 조희룡은 어떤 인물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 후기의 화가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이 그린 봄날 산속에 매화가 핀 풍경. 조희룡은 매화를 사랑하여, 자신의 거처를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 불렀을 정도였던 인물이었다조희룡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화가로써 조선에서 매화를 가장 잘 그리는 화가로 대표작으로는 홍매도대련, 매화서옥도 등이 있는데 조희룡의 예술세계를 남의 수레 뒤를 따르지 않는다는 불긍거후(不肯車後)의 정신으로 상징되었으며 이런 정신을 바탕으로 조선 문인화의 시대를 개척한 인물이기도 합니다그는 중국과 우리나라 회화사에 관심이 많았으며, 청나라 화적을 직접 소장하고 비평을 하는 등 그림에 대한 인식의 폭이 넓었다. 화론에서는 수예를 강조하고 재능을 중시하여 서화가에게는 학식뿐만 아니라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재주, 즉 기량이 있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Q. 신라 시대의 진골들은 어떤 교육 과정을 거쳤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진골은 대부분 왕족출신이었고, 일부는 인접국의 지배층으로 있다가 신라에 투항하여 진골신분에 편입되기도 했다. 성골과 진골의 차이는 확실하지 않지만, 본래 같은 왕족의 범주에 속해 있다가 진흥왕의 장자인 태자 동륜(銅輪) 계열의 후손들이 왕위를 차지하면서 불교의 전륜성왕(轉輪聖王) 설화를 끌어들여 자신들의 혈통을 다른 왕족과 구별하고 신성시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성골이 없어지자, 이후부터는 태종무열왕계의 진골출신이 왕위에 올랐다.진골이 신분상 모든 관등에 올라갈 수 있었고 각 중앙관서의 장관직을 독점한 데 반하여, 6두품은 제6관등인 아찬까지만 오를 수 있었고 관직도 시랑이나 경(卿)과 같은 차관직밖에 차지할 수 없었다. 복색·그릇·수레·가옥 등 모든 면에 있어서 진골은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경제적으로도 녹읍과 전장(田莊)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대규모의 목장과 노비 등을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정치·군사뿐만 아니라 학문·사상 분야에서도 뛰어난 인물들을 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