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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기태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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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전문가
보성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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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
역사
2024년 3월 21일 작성 됨
Q.
짧은 기간 왕위를 지킨 단종도 후궁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단종은 너무 어린 나이에 재위에 올라 왕비는 물론 후궁도 없이 세조에 의해 계유정난으로 강제로 퇴위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 불운한 왕이었습니다.
역사
2024년 3월 21일 작성 됨
Q.
남묘호렌게쿄가 일본불교라고 하던데 맞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본은 1억 2천 7백만명 중 불교도가 9천만명이고 신도가 1억 1천만명으로 불교도이면서 신도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기독교는 전체 인구의 5%도 되지 않습니다. 남묘호란겐코는 나무묘법연화경의 일본식 표현으로 일본 불교입니다. 남묘호란겐코 주문을 외우면 내 사주팔자가 좋아지고 모든 소원이 이뤄진다고 믿습니다.
역사
2024년 3월 21일 작성 됨
Q.
거란은 어떻게 강성한 나라로 발전할 수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거란은 5세기 말에 발흥하여 부족들을 연합하여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고 특히 발해를 멸망시키고 만주 전역을 손아귀에 넣으면서 동아시아의 강대국이 뒤었습니다.
역사
2024년 3월 21일 작성 됨
Q.
고려는 귀주대첩이후에 왜 거란을 토벌하지 않고 화친하게 되었는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거란은 동아시아의 강대국이었고 기병을 바탕으로 속도전을 펼쳐서 짓밟은 잔인한 족속들이었습니다. 강감찬장군의 전략과 전술에 힘입어 승리할 수 있었으나 고려가 거란쪽으로 공격해가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역사
2024년 3월 21일 작성 됨
Q.
서희는 어떻게 강동6주를 얻을수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거란은 5세기에 발원하여 10세기 초에 발해를 멸망시키고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발돋움하였습니다. 만주와 중국 북부를 아우르던 거란은 송나라와의 한판승을 벼르고 있었기 때문에 송과 친교를 맺고 있는 고려를 먼저 단속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거란의 성종은 소손녕에게 100만대군을 주어 고려를 겁박하도록 했으나 초기에는 고려가 맥없이 무너졌으나 고려의 성종은 조정대신들의 항복 권유에도 굴하지 않고 서희를 보내 담판을 짓게 하였고 소손녕을 만난 서희도 대담성으로 신라의 후손이기에 철령이북 땅을 내놓으라는 소손녕에 맞서 고구려의 후손임을 내세워 오히려 강동 6주를 할양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원래 침략의 의도보다 송과의 단절과 거란과의 친교가 목적이었던 거란은 서희가 말한대로 거란과 친교와 무역거래를 하고 싶어도 여진족이 중간에서 가로 막고 있어서 할 수 없었다고 하자 거란은 여진족을 몰아내고 고려에 강동 6주를 주는대신 송과의 단절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런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요의 성종은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으나 홍화진에서 양규장군에게 패하였고 망신살이 뻗치자 현종의 친조를 약속받고 물러나게 됩니다.
미술
2024년 3월 21일 작성 됨
Q.
성 베드로 광장을 계획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666년 완성된 성 베드로 광장은 베르니니가 설계한 광장입니다. 광장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까지 이어지는 콜로네이드는 284개나 되는 기둥이 받치고 있으며 기둥 위에는 140개의 카톨릭 성인들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정교한 조각들은 모두 베르니니의 제자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역사
2024년 3월 21일 작성 됨
Q.
조선 시대에 산송문제는 왜 일어났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산송은 분묘와 분묘 주변의 산지를 대상으로 하는 소송입니다. 노비ㆍ전답 소송과 함께 3대 사송 중 하나로 묘지 소송이라고도 합니다. 16세기 이후 부계 분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묘지 풍수의 유행으로 길지를 확보하기 위한 사회적 욕구가 높아졌기 때문에 크나큰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역사
2024년 3월 21일 작성 됨
Q.
태종은 어째서 9명이나 후궁을 들였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 왕은 27명 후궁의 숫자는 175명으로 왕 한명당 평균 6.4명의 후궁을 둔 숫자입니다. 한명의 후궁만 둔 왕도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은 후궁을 둔 왕들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많은 후궁을 둔 왕이 조선 3대 왕인 태종으로 19명의 후궁을 두었습니다. 태종을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데 공을 세운 원경왕후가 있었으나 태종은 왕권강화에 집착한 나머지 후궁간택제까지 두고 원경왕후와 갈등을 겪으면서도 후궁들을 들였습니다.
역사
2024년 3월 21일 작성 됨
Q.
1~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남미 국가들은 전쟁에 참전을 안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터가 된 곳은 유럽과 아시아였기 때문에 남미 국가들은 직접적인 이해 당사국은 아니었습니다. 국가별로 연합군을 편들거나 추축국을 편들기도 하고 대부분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였습니다. 브라질 같은 경우는 연합국의 편을 들었고 독일 잠수함에 의해 자국의 상선들이 위협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역사
2024년 3월 21일 작성 됨
Q.
읍참마속에 대한 질문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제1차 북벌 때 마속이 제갈량의 지시를 어기고 자기의 얕은 생각으로 전투를 벌이다 참패를 하게 됩니다. 마속은 뛰어난 장수요 제갈량과 문경지교를 맺은 마량의 아우였지만 한중으로 돌아와 마속의 목을 벤 뒤 장졸들에게 사과하였습니다. 장관이 제갈량을 보고 앞으로 천하를 도모하는데 마속같은 유능한 인재를 없애는 것은 아까운 일이라고 하자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며 손무가 싸워 항상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군율을 분명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같이 어지러운 세상에 전쟁을 시작한 처음부터 규율을 무시하게 되면 어떻게 천하를 평정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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