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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기태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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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7일 작성 됨
Q.
조선시대에 민간신앙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에는 불교가 억압된 것과 다르게 민간신앙은 계속 번창하였습니다. 금무라는 국가 정책에 따라서 지나친 행동이나 무속이 표면에 나타나는 것은 제한되었습니다. 특히 무격을 전담하는 관청으로서 성수청ㆍ활인서 등이 있었습니다. 또 기우 기은 기자 산천제 성황제 등은 사제무가 맡아서 하였으며 성수청과 활인서에 국무 또는 무녀들을 두어 백성의 질병을 치료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간사 길흉화복을 점치는 점복무가 크게 성행하였습니다. 여러 신에 대한 민간신앙도 고려 못지 않게 성행하였습니다. 영성단과 노인성당을 서울 남쪽에 두었고 함흥 남쪽에 제성단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산신제는 백악산 송악산 감악산 삼각산 등 4악산의 산신단을비롯하여 전국의 주요 산과 마을에서 거행되었으며 이밖에도 천신 삼해신 칠독신 등이 있어서 무녀를 비롯한 기복자들이 즐겨 기도를 드렸습니다. 동물신으로 산신인 호랑이를 비릇하여 재산신으로 숭상되었던 두꺼비 제주도 사귀당에서 제사를 지냈던 사신 수신으로 받들어졌던 용에 대한 신앙이 크게 성행하였습니다.
역사
2023년 12월 7일 작성 됨
Q.
영조는 정말 사도세자를 죽일 의도가 있었을까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사도세자는 영조가 아껴서 어렸을 때부터 세자교육을 받았고 1739년(영조 15) 5살에 영조 대신 대리청정을 하였고 1742년 8살에 종묘에 참석하는 의식에 세자를 참여시켰는데 세자가 법도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모두 우러러 보았습니다. 1747년 궁안에 천연두가 발생하여 경덕궁으로 피신하여 문안을 드리지 못한 일이나 공식적인 만남이 있을 때만 만나고 만나기를 주선하는 사람이 있을 때만 만날 정도로 영조와 사도세자 간에는 친밀함이 적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세자교육을 강압적으로 받아왔고 영조가 직접 친문하는 지리에서 압박감을 느낀 세자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하여 정신분열증을 앓게 되었고 이것이 궁녀를 겁탈하고 궁인들은 살해하는 만행으로 이어지고 급기야는 동궁을 사칭하면서 사가의 여인들까지 겁탈하는 만행들이 발생하기도 하자 왕실의 위기는 고조되었습니다. 1757년 1758년 사도세자의 병이 깊어지면서 발작할 때는 궁비와 횐시를 죽이고 괜찮아지면 후회하곤 했습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하려 했으나 폐하지 못했는데 영빈까지 세자의 일을 고하자 결국 폐서자 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폐서인이 되어 뒤주에 갇혀있던 세자는 5월 21일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역사
2023년 12월 7일 작성 됨
Q.
허수아비의 유래는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농경 5천년 문화 역사 농경 사회의 허수아비의 유래는 옛날에 지극한 효자 부부가 비 가림막으로 만든 볏짚을 벗어서 지게에 걸어 놓은 것이 허수아비의 시초입니다. 옛날에 효자부부가 어렵게 농사를 지으며 살았으나 날짐승들이 곡식을 따먹어 수확량이 줄어들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부모님 병수발에 약초를 캐러 갔다오면 새들이 곡식을 다 따먹어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새들이 따 먹은 만큼 저녁을 굶기로 하고 몇날 몇일을 허기진 배를 물로 채우며 식량을 아껴서 부모님 병환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어느날 용한 의원 집에 약을 지으러 가는데 비가 장대같이 쏟아지자 볏집으로 엮어서 입고 집에 와서 지게에 걸어놓고 산에 갔다 왔는데 멍석에 널어 논 곡식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텃밭과 논에도 새들이 없고 멀리서 지저귀고만 있었습니다. 지게에 걸어둔 볏짚을 사람으로 착각해 새들이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부터 허수아비를 논밭에 세워놓는 풍습이 생겼습니다. 허수하다의 옛말이 허소하다인데 얼마쯤 비어서 허전하다는 뜻입니다. 이에 허소가 변한 허수에 아비가 붙여진 이름이 허수아비입니다.
역사
2023년 12월 7일 작성 됨
Q.
조선의 성종이 경국대전을 완성할 수 있었던 배경은?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경국대전은 조선시대의 최고 법전입니다. 조선 세조 대에 편찬을 시작하여 성종 대에 들어 완성 반포되었습니다. 세조는 즉위와 더불어 영원히 변치 않는 대법전을 편찬하려는 뜻을 품고 육전상정소를 신설하여 육전상정관으로 하여금 편찬케 하고 세조가 스스로 심의 수정을 보았습니다. 1467년 세조는 수정 심의를 하다 끝을 못보고 죽게됩니다. 이듬해 1월 1일 시행키로 했으나 그 해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합니다. 성종 즉위 후에 다시 수정의 의견이 일어나 교정을 가한 후 1470년(성종 1) 드디어 완성 이듬해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는데 이것이 신묘대전입니다. 이 신묘대전에 대한 논의로 1474년(성종 5)에 새롭게 고쳐진 갑오대전이며 이것 또한 심의 수정을 거쳐 1년 뒤인 1484년(성종 15) 12월에 완성되어 이듬해 1월 1일부터 시행한 6전이 을사대전입니다. 오늘날 전해져 오는 경국대전은 을사대전이며 이전의 것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습니다.
음악
2023년 12월 7일 작성 됨
Q.
극단 선택시 가장 중요한게 뭘까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극단을 선택할 때 소속 배우들의 열정과 단장의 리더십 그리고 경제력입니다. 우리나라 극단은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열정페이를 강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지 연기를 하고 싶고 무대에 서고 싶다는 열정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최소한의 경제력은 밑받침이 되어야 안정적인 연기와 팀워크도 생긴다고 봅니다. 여기에 열정과 혼신의 연기가 발휘된다면 금상첨화입니다.
역사
2023년 12월 6일 작성 됨
Q.
고조선을 말하는 기자조선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단군의 건국이야기에 대한 사료는 고려시대 이전은 수많은 외침으로 사라지고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단군신화라고 불리우며 고증에 어려움이 있으나 규원사화에는 1대 단군부터 47대 단군명이 나올 정도로 역사적 실체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단군은 신화가 아닌 역사적 실체로 봐야 합니다. 은나라의 기자가 와서 기자조선을 세우고 주나라의 위만이 와서 위만조선을 세웠다는 것은 중국의 기록에 의한 것으로 우리나라를 속국으로 보는 입장을 보인 것으로 신빙성을 갖지 못하며 우리의 역사적 실체를 확보하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역사
2023년 12월 6일 작성 됨
Q.
1980년 5월 17일 신군부가 제주도를 제외한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준으로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만 한정하여 발령되어 있던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조치로 전두환 노태우가 주축이 된 하나회가 정권 장악을 위해 신군부가 일으킨 5.17 내란의 핵심입니다. 1979년 12월 12일에 12.12군사반란으로 사실상 정국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전두환 집권 성공을 위하여 야권과 노동계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을 차단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들은 국회 해산과 3김의 정치 활동 규제 비상기구(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를 기도하고 육군 특수전사령부를 중심으로 한 일명 호국충정훈련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쿠데타를 위한 사전작업이었습니다. 이로써 모든 정치활동은 금지되었으며 이후 제도권 내 인사들은 학생 노조 배후혐의 및 부정축재자로 규정하여 수백명의 일반직 특정직 정무직 공무원 야당인사들을 퇴출시키고 행정권과 입법권을 장악했으며 신현확 내각은 반강제적으로 퇴출되었습니다. 1980년 8월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추대로 11대 대통령이 되었고 10월에는 국가보위입법회의를 설치하여 입법권도 장악했습니다. 이듬해 2월 기존의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살짝 변형하여 대통령선거인단을 통해 12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민주화를 열망하던 국민들은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역사
2023년 12월 6일 작성 됨
Q.
이순신, ‘충무공’이라는 호는 왜 붙여진건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충무공은 나라에 무공을 세워 죽은 후 충무라는 시호를 받은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입니다. 대표적 인물로 이순신 김시민 남이 정충신 등이 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이 된 것입니다.
역사
2023년 12월 6일 작성 됨
Q.
고려양이라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 몽골은 조공을 더 많이 바칠 것과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침입하여 80여년간 9차례에 걸쳐 침략하여 고려 강산을 유린하였으며 20여만명의 남녀를 몽골로 잡아갔습니다. 몽골의 풍습이 고려에 들어와 몽고풍(변발과 호복) 이 되었고 고려의 문화도 우수하였기에 몽골에 영향을 주어 고려양(의복 신발 모자 등의 복식과 만두 떡 등의 음식 아청 등)이 되었습니다.
역사
2023년 12월 6일 작성 됨
Q.
삼국지에서 유비는 왜 제갈량을 삼고초려하였을까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위촉오 삼국시대에 촉의 유비는 인재를 모으고 있었습니다. 그중 한명이 서서입니다. 비범한 지혜에 탄복한 유비는 그를 군사로 임명합니다. 어느 날 서서가 유비에게 말했습니다. 융중이라는 마을에 천하에 보기 드문 선비가 있는데 성은 제갈 이름은 양 자는 공명이라고 하며 세인들은 그를 와룡선생이라고 부릅니다. 주공께선 왜 그를 청해오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세 번을 찾아간 끝에 제갈공명을 군사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삼고초려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고 그럴정도로 제갈공명은 출중한 인물로 책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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