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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기태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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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3일 작성 됨
Q.
부평역이나 여러 지하철역을 보면 과거부터 아주 큰 지하상가가 생겨나게 된걸까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지하상가의 장점은 날씨에 영향을 덜 받는다는 점과 교통사고의 위험이 적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점으로 화재 홍수 지진에 취약하며 국내 지하상가들은 노후화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대규모 지하상가의 경우에는 구조가 복잡하여 길치들은 한참을 헤매다 고생하기도 합니다. 21세기 들어 많은 지하상가는 민자역사와 함께 들어서는 백화점 같은 대형매장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부평역은 단일 지하공간에 가장 많은 점포가 입점한 곳입니다. 세계 기록을 가진 지하상가입니다. 악명 높은 복잡함의 소재로 쓰이기도 합니다.
역사
2023년 12월 3일 작성 됨
Q.
일제시대공부하다보니 헤이그특사가 나오던데 어떤특사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종이 1907년 네덜란드 수도인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정사에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과 부사에 전 평리원검사 이준 그리고 주로한국공사관 이위종 등 3인을 특사로 파견하여 일제에 의하여 강제 체결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한국 두권회복을 열강에게 호소한 외교활동으로 일명 헤이그밀사사건이라고 불립니다.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의 승리로 한국을 병합하기 위해 외교활동을 벌여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열강들이 일제의 한국 침략을 묵인하도록 조처한 뒤 1905년 11월 고종고가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합니다. 그러나 고종은 이 조약을 인준하지 않고 틈만 있으면 대외에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친서를 보냈습니다. 1906년 6월 평화회의 주창자인 니콜라이 2세가 제2회 만국회의 초청장을 보내오자 고종은 일제의 폭력적 침략을 호소하고자 특사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어렵게 간 특사들은 회의장 입장이 좌절되었고 비공식적 채널인 각국신문기자단의 국제협제에 참석하여 영어에 능통한 이위종의 연설로 한국의 호소를 절규 청중들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이준도 같은 이유로 모색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분사하는 불행을 맞게 되었습니다.
역사
2023년 12월 3일 작성 됨
Q.
위정척사운동은 무슨 운동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 후기 19세기 말에 위정척사운동이 전개됩니다. 올바른 것은 지키고 사악한 것은 배척하자는 운동으로 정학인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고 서학인 천주교는 배척하자는 운동입니다. 자주민족정신과 의리정신 그리고 호국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최익현 이항로 기정진 등이 핵심인물입니다.
역사
2023년 12월 3일 작성 됨
Q.
신라가 불교를 종교로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불교가 우리나라에 전파된 것은 삼국시대였습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년)에 전진의 스님 순도가 불상과 불경을 가져옴으로써 전파되었고 백제는 동진의 스님인 마라난타가 침류왕(384년) 때 전파하였습니다. 신라는 순도의 제자인 아도가 암암리에 전파하였습니다. 워낙 샤머니즘적 성향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23대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로 비로소 불교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역사
2023년 12월 3일 작성 됨
Q.
로스엔젤레스를 나성이라고도 불렀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로스앤젤레스(Los Angeles)는 스페인어로 천사들이라는 단순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자식 가차 표기로 나성(혹은 라성)이라고 씁니다. 이 한자식 표기는 보통 중국에서 자기들 발음에 맞는 한자를 차용해서 사용하던 것을 한국에서 그대로 들여와 쓴 경우가 많으며 당연히 LA를 라라고 읽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정확히는 19세기 나성지리에서 나성을 따와 한국어에서 발음이 같고 도시를 의미하는 성으로 전이된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낙삼기(뤄산지로 읽음)라는 표기를 씁니다. LA한인교회들 상당수가 나성XX교회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한때 총영사관에서 발행하는 공문서는 주라성총영사관이라는 직인이 찍혔습니다. 현재는 주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으로 바뀌었습니다.
역사
2023년 12월 3일 작성 됨
Q.
인도의 사티제도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시바의 첫 부인 삭티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으나 아버지가 남편 시바의 명예를 모독한 것에 분노한 나머지 희생제에 몸을 던져 희생했다는 이야기에서 악습이 유래했다는 설입니다. 사티(Sati)는 남편이 죽으면 시체를 화장할 때 아내가 불 속에 뛰어들어 남편의 시체와 함께 불타는 풍습입니다. 사티는 정숙한 아내라는 어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역사
2023년 12월 3일 작성 됨
Q.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파 노덕술을 두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노덕술은 악질적인 일제부역자로 일제강점기에 당시 창씨개명한 이름은 마쓰우라 히로였습니다. 좌우를 불문하고 친일부역자임을 공인하고 있습니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이고 약산 김원봉을 북으로 가게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1920년에 경남 순사교습소를 졸업하고 경찰 근무를 시작하고 1921년에 순사부장 1924년 경부보 1932년 경부 1943년 경시 1944년 수송보안과장까지 승진합니다. 조선인으로서는 초고속 승진으로 경감 총경까지는 간 셈입니다. 어찌나 악랄했던지 민중들 사이에 친일고문경찰=노덕술로 불리워졌습니다. 해방 이후 평양경찰서장을 맡고 있던 노덕술은 공산주의 세력에 체포되어 몇 달간 구금되었다가 1945년 말에 탈옥 후 월남합니다. 다음 해에 장택상에 의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됩니다. 노덕술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 당한 것도 있고 정권에 아부하기 위해 그 비루한 명줄 한번 늘리겠다고 경찰 내 반이승만 세력을 축출하고 좌익분자 검거에 주력합니다. 반민특위 간부 암살미수와 친일행위로 지명수배 당한 상태에서도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니는 등 권력을 등에 업고 못할 것이 없습니다.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체포되자 이승만은 단순한 기술자라고 그의 석방을 종용하여 김상덕 반민특위원장에게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게 안먹히자 이승만은 반민특위 활동을 중지시키고 특위활동을 방해하였습니다.
역사
2023년 12월 3일 작성 됨
Q.
고려시대 무신 양규는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 무신으로 거란 성종의 40만 대군에게 홍화진에서 포위되자 완강히 저항하다 무로대 이수 석령 여리참 등에서 기습하여 7전7승에 약 7000명을 사살하고 잡혀가는 백성 1만여명을 구하였습니다. 이어 애전에서 적을 기습하여 1000여명을 베었으나 대군의 공격을 받아 김숙홍과 함께 전사하였습니다. 삼한후벽상공신에 추봉되었습니다.
역사
2023년 12월 3일 작성 됨
Q.
조선이 되면서 고려의 왕족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은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 등을 유배보내고 정몽주를 따르던 최측근 8명은 곤장 100대를 때려 사망케 합니다. 고려 왕씨 왕족들은 거제도와 강화도로 유배를 보냈습니다. 1393년 이성계는 공양왕 동생을 불러 자신은 왕씨들을 해칠 마음이 없다며 육지에 살게 합니다. 그러나 경남에서 김가행 박중질 등이 왕화 왕거와 접촉하여 고려 왕실 복원운동을 꾀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1인자가 못하면 2인자가 나서듯이 정도전이 나서서 다시 왕씨들을 거제도와 강화도로 유배를 보냅니다. 공양왕과 자식들은 유배를 가는 도중에 후송을 맡은 중추원 부사 정남진의 손에 삼척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강화도로 유배가던 왕씨들 모두는 김포에서 강화도로 가는 강화나루에서 수장당합니다. 1394년 4월 20일 조선왕조 태조실록에는 중앙과 지방에 명령하여 왕씨의 남은 자손들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목을 베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해바다 수장형 뿐만아니라 교살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역사
2023년 12월 3일 작성 됨
Q.
강감찬 장군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강감찬 장군은 고려시대 문신입니다. 983년(성종 3)에 장원급제하여 예부시랑 한림학사를 거쳐 평장사가 되었습니다. 1010년(현종 1)에 강조정변으로 강조가 목종을 폐위시키고 유배길에 살해했으며 현종을 옹립한 것을 빌미로 거란은 요나라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2차 침입을 합니다.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임명하여 대적케 했으나 크게 패하고 맙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신하들이 항복하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강감찬은 절대 굴복할 수 없다고 전략상 일시 후퇴를 주장하며 현종에게 피신할 것을 권합니다. 왕은 나주까지 피신하였으나 사직은 지키게 됩니다. 이듬해에 국자제주가 되고 1018년(현종 9)에는 경관직인 내시사랑 동내사 문하평장사와 외관직인 서경 유수를 겸임합니다. 서경 유수는 단순히 지방행정관직이 아니라 군사지휘권도 행사하는 요직으로 강감찬이 이 직을 맡게 된 것은 요나라의 침입에 대비한 것으로 보입니다. 1818년(현종 9)에 고려 현종이 입조하지 않은 것과 강동 6주를 돌려주지 않았다고 소배압의 10만 대군이 쳐들어왔습니다. 강감찬은 홍화진의 강 상류의 물을 막고 있다가 요나라 군사들이 도하할 때 막아둔 강물을 풀어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군사들이 혼란한 틈을 타서 요나라를 크게 무찔렀습니다. 이어 자주와 신은현에서 헙공하여 요나라군을 추격하여 귀주에서 적을 섬멸하여 살아 돌아간 이들은 겨우 수천에 불과할 정도로 큰 공을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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