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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기태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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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전문가
보성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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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한국에 햄버거는 언제 처음 도입되었는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에 햄버거가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1979년 소공동의 롯데리아 1호점입니다. 빠르고 간편한 서비스와 서구적인 맛을 앞세운 햄버거 당시 자짱면을 제치고 단숨에 인기메뉴로 등극하였습니다. 소공동 롯데리아는 햄버거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 덕분에 개점과 동시에 서울의 명소로 급부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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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나라 최초의 치과병원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최초의 치과병원은 제중원이 뿌리가 된 세브란스 병원입니다. 치과의사는 1908년 우리나라 최초로 의사면허를 받은 제1회 졸업생 7명이 배출되었습니다. 김필순 김희영 박서양 신창희 주현측 홍석후 홍종은이 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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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최초의 불경은 언제 어디서 발견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파키스탄과 아프카니스탄 등지에서 발견된 카로슈티 문자로 기록된 폐업경들 성립 연대는 기원전 2세기로 불교를 신앙하면서 인도 곳곳에 불경의 내용을 인용한 비문과 석주를 세운 아소카 대왕 시대와 거의 겹칩니다. 이 카로슈티 문자 불경이 발굴되면서 팔리어 불경은 독점적으로 누려오던 위상에 타격을 입게 됩니다. 간다리 지역에서 출토된 경전 중에는 법구경과 코뿔소경도 있으며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잠아함경도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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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여기저기 관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한테 너는 약방의 감초다고 말하는데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감초는 중화작용이 탁월하여 두루 쓰이는데 조선 중기 때 문신 윤선도의 문집 《고산유고》의 에는 감초는 다른 약들을 중화시키고 백 가지 독을 없애기 때문에 극로라고 부르는데 인재에 비유하면 《서경》 에서 말한 단단일개신(한결같고 포용력 있는 덕을 갖춘 인물)이 여기에 해당하니 비록 다른 약들이 있더라도 이것이 없으면 어렵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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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 교통도 발달 안되고 통신시설도 미비한데 전국에 현장수배가 가능했을까?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에는 오느날의 몽타쥬에 해당하는 용모파기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주로 관아에 소속된 용모화공이 그렸습니다. 중요 범죄자는 이런 용모파기를 그려서 마을 입구나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붙여놓아 신고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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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하나회는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없어졌는지?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정규육사 출신인 육사 11기는박정희의 총애를 빌미로 자신들의 비밀사조직인 하나회를 조직합니다.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김복동 등이 주축이 되어 조직하였으며 기수당 2-3명을 포섭하여 맹세를 하게 하여 약속을 어기면 패가망신을 당할 수 있음을 강요하였습니다. 군부내 하나회 조직은 군부에서 가장 빠른 진급과 좋은 보직을 점하였으니 훌륭한 군인들의 진급을 막아 전역케하는 폭력을 자행해왔습니다. 하나회가 수면으로 올라온 것은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가 죽자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전면에 나서면서입니다. 합수부장을 맡은 전두환 소장은 안하무인 성격으로 상관들을 무시하여 미움을 받아 동해경비사령부로 발령될 사실을 도청하여 오히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내란방조죄로 엮어 구속시키고 육본을 장악하는 12.12군사반란을 일으킵니다. 그야말로 하극상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군의 생명이라고 할 수 명령체계가 무너지고 하나회 소속 장교들은 직속상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하나회 선배들의 지시에만 따르는 등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군이 사조직에 의해 움직이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11대 12대 전두환 13대 노태우의 신군부는 하나회 조직이 아니면 진급하지 못할 정도로 군부내 주요보직은 하나회로 채워지게 됩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하나회에 철퇴를 가한 것은 3당 야합으로 정권을 잡은 김영삼이었습니다. 김영삼 정권은 집권초기부터 숙군작업을 통해 하나회를 솎아내어 전역을 시키거나 한직으로 발령을 내는 등 전 군에 있는 하나회 조직을 와해시키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회가 주요보직을 차지하고 있었을 뿐만아니라 육사 기수별로 있었기 때문에 숫자가 너무 많아서 전부를 전역시키는데에는 무리가 있어 영관급까지만 퇴역시키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진행하였습니다. 하나회의 반발도 커서 21기들을 중심으로 쿠데타 이야기도 있었지만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회 뿐만아니라 만남회 알자회 등 군부 내 사조직은 모두 철퇴를 맞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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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옛날에는 무더운 여름에 에어컨도 없이 어떻게 지낼쓸까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선풍기 냉장고는 커녕 전기조차 없던 시절에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더위를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우리나라에는 산과 계곡이 많고 숲이 무성하며 계곡마다 맑고 시원한 물이 흘러내리는데 옛 선인들은 이러한 자연환경을 이용하여 산과 시냇물에서 무더위를 극복하곤 했습니다. 신라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유두(음력 6월15일)라는 풍속이 있어 여름월 가장 무더운 시기에 일가 친지들이 모여 음식을 장만하고 맑은 개울이나 산간폭포로 있는 곳으로가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으면서 서늘함을 취하고 마련해간 음식을 먹으면서 시원하게 지내는 것을 말하는데 물맞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여름네 질병을 물리치고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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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서희의 외교단판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거란의 1차 침입 때 고려의 장수 서희가 거란 장수 소손녕을 상대로 담판을 벌여 강동 6주를 할양받게 되었는데 거란의 소손녕은 80만 대군을 이끌고 왔으니 빨리 항복하고 고구려의 옛 땅을 돌려달라는 주장을 합니다. 이는 고려가 신라를 계승하였다는 전제로 윽박지른 것입니다. 고려 조정은 항복하자는 의견을 성종에게 전하며 서경 이북 땅을 돌려주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서희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거란이 땅을 욕심내서 처들어온 것이 아니라 송과의 전쟁을 앞두고 거란의 뒤를 공격할 수 있는 고려를 다잡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오히려 큰소리 치며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였고 도읍도 서경(원래는 개경이었지만)이라고 주장하며 거란과 통상거래를 하고 싶어도 여진이 중간을 가로막고 있어 할 수 없었다고 하니 소손녕은 그러면 거란이 여진을 몰아낼테니 거란과 화친을 맺자고 하여 골칫거리인 여진을 몰아내고 강동 6주를 건설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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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사주와 관상 이런게 맞나요? 현대사회와 안맞는데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사주나 관상은 과학이라기 보나는 통계학적인 측면이기 때문에 한명 한명 모두에게 맞다고 볼 수 없습니다. 다만 통계학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전혀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남녀가 궁합을 보러가면 사주 관상에 의하지 않더라도 둘 다 좋을 확률 25% 남자 또는 여자 한 쪽이 좋을 경우50%(남25%+여25%) 둘 다 안 좋을 확률 25%입니다. 결국 둘 다 좋을 확률은 25%고 안 좋을 확률은 75%나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만수무강에 좋을 수 있습니다. 근면 성실 절제 절약의 삶을 산다면 복은 저절로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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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려가 여진족과 거란족에 어떤 영향을 받았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여진족은 퉁구스계 종족으로 만주지방에 거주했던 숙신 말갈계의 후손으로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운 민족으로 조선을 침공하여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을 일으켜 인조의 삼전도 굴욕을 안겼고 소현세자와 세자빈 봉림대군부부 삼학사(윤집 오달제 홍익한)를 볼모로 청나라로 끌고갔습니다. 거란족은 준몽골계로 동호-선비족에서 갈라져 나왔으며 10세기에 요나라를 세워 동아시아의 막강한 세력으로 군림하면서 고려를 993년 1010년 1018년 3차례에 걸쳐 침공하였습니다. 1차 침입은 송과의 전쟁을 앞두고 무력시위적인 측면이 강했고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할양받는 성과를 이루었고 2차 침입은 서북면도순검사인 강조가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을 옹립한 것을 빌미로 쳐들어와 현종이 나주까지 피신하였습니다. 강조는 살해되었습니다. 3차 침입은 현종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여 소배압이 10만대군을 이끌고 왔으나 고려의 명장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적을 섬멸하여 살아돌아간 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귀주대첩의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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