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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원태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김원태 전문가입니다.

김원태 전문가
Q.  불국사에 금돼지 동상은 언제 생긴건가요?
안녕하세요. 김원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지난 2007년 초 극락전 현판 뒤에서 자그마한 돼지 조각이 우연히 발견됐다. 불국사가 처음 문을 연 통일신라 시대부터 천수백 년, 임진왜란 때 불타고 극락전이 다시 지어진 1750년부터 따져도 250년 넘게 숨어 있던 돼지 조각이 발견된 일은 큰 화제를 모았다. 많은 이들이 이곳에 찾아와 복을 빌었고, 불국사에서는 ‘극락전 복돼지’라는 공식 이름을 지어주고 기념 100일 법회를 성대하게 열었다. 현판 뒤에 숨어 잘 보이지 않는 복돼지를 누구나 쉽게 보고 만질 수 있도록 극락전 앞에 자그마한 복돼지상까지 만들었다.
Q.  기록으로의 역사와 사실로의 역사의 가장 큰 차이점이 뭔가요?
안녕하세요. 김원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역사라는 말은 사람에 따라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과거에 있었던 사실’과 ‘조사되어 기록된 과거’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즉, 역사는 ‘사실로서의 역사(history as past)’와 ‘기록으로서의 역사(history as historiography)’라는 두 측면이 있다. 전자가 객관적 의미의 역사라면, 후자는 주관적 의미의 역사라 할 수 있다.사실로서의 역사는 객관적 사실, 즉 시간적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모든 과거 사건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는 바닷가의 모래알 같이 수많은 과거 사건들의 집합체가 된다.기록으로서의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토대로 역사가가 이를 조사하고 연구하여 주관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역사가의 가치관과 같은 주관적 요소가 개입하게 되며, 이 경우 역사라는 말은 기록된 자료 또는 역사서와 같은 의미가 된다.우리가 역사를 배운다고 할 때, 이것은 역사가들이 선정하여 연구한 기록으로서의 역사를 배우는 것이다.자료출처 : 우리역사넷
Q.  조선시대에 호패는 누구에게 지급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원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에는 호패와 호패를 장식하던 호패 술을 통하여 조선시대 남성의 장신구에 대한 취향을 살펴볼 수 있다. 호패는 조선시대의 신분증으로, 오늘날 만 17세 성인 남녀가 모두 발급받는 주민 등록증과는 달리 남자들만 지급받았다.호패는 1354년(공민왕 3)에 원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시행하였으나, 잘 시행되지 않았고 조선시대 들어와서 확대되었다. 호패법을 제정한 목적은 호적을 파악하여 요역과 군역 자원을 확보하고 세금을 걷어 들이는 데 있다. 호패는 품계와 신분에 따라 기재하는 내용과 만드는 재료가 달랐다. 『속대전』에 보면 2품 이상은 상아, 3품 이하 잡과 합격자는 각(쇠뼈), 생원이나 진사는 황양목, 잡직·서인·서리는 소목방패, 공·사천(公私賤)은 대목방패로 만들었다고 한다.호패는 신분에 따라 재료가 달랐지만 호패를 장식하는 술은 개인적 취향이나 경제력에 따라 달라졌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호패를 보면, 신분이 높아도 호패 술은 별반 장식이 없는 것도 있지만, 벼슬하지 않은 사람의 것일지라도 상아로 깎은 주판알 같은 구슬 장식을 이중으로 하여 멋을 내고, 호패 술도 매우 풍성하고 긴 것들이 더러 있다.자료출처 : 우리역사넷
Q.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어떻게 운영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원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에는 오늘날의 공무원처럼 임금님을 도와서 나라를 위해 일하던 수많은 관리들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관리가 되는 길에는 과거, 음서, 천거가 있습니다. 과거는 시험을 봐서 관리가 되는 방법이며, 음서는 높은 지위를 가진 관리의 자손에게 관직을 주는 제도입니다. 그리고 천거는 추천을 통해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입니다.이 중에서 과거제도가 대표적인 관리 선발 제도였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에는 개인의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과거는 크게 문과, 무과, 잡과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문과는 문관을 선발하는 시험으로, 예비시험과 본시험이 있습니다. 예비시험으로 생원시와 진사시를 거쳤는데 이를 소과라고 부르고, 본시험인 문과를 대과라고 부릅니다. 문과는 유교경서의 해석, 문장을 짓는 능력, 나라의 문제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제시하는 시국관 등을 시험 보았습니다.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선생 모두 문과시험을 치른 인물입니다. 무과는 무관을 선발하는 시험으로, 시험과목으로 실기와 이론이 있었습니다. 실기과목에는 목전, 철전, 기사, 기창, 격구 등이 있습니다. 시험과목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였는데요. 예를들어 임진왜란 이후에 조총이 시험과목에 포함되었습니다. 이론시험에서는 사서오경 중의 하나, 무경칠서 중의 하나, 경국대전 등을 구술하는 시험을 보았습니다. 즉 유교적 소양과 무예 둘 다 갖추어야 무관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이순신 장군도 무과시험을 통해 관리가 된 인물입니다. 잡과는 기술관을 선발하는 시험으로 역과, 율과, 의과, 음양과의 네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역과는 외국어를 담당하는 통역관을 선발합니다. 율과는 법률을 담당하는 율관을 선발하는 시험입니다. 의과는 의술을 담당하는 의관을 선발하는 시험으로 동의보감을 지은 허준도 의과시험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음양과에서는 천문학, 지리학, 명과학을 담당하는 관원을 선발하였습니다. 잡과는 각 과의 전공서적과 경서 및 경국대전을 필수과목으로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유생이라면 누구나 과거 합격을 소망했지만 이는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정기 과거시험은 3년에 한번 시험을 보았습니다. 경우에 따라 나라에 기쁜일이 있거나 행사가 있을 때 비정기적으로 시험이 치러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최종 선발 인원이 매우 적었습니다. 문과는 최종시험에서 33명을 선발하였으며, 무과는 28명을 선발하였습니다. 조선시대 과거합격자 발표의식을 방방의식이라고 합니다. 방방의식에는 왕, 관료들은 물론 합격자의 친척들도 함께 참여하여 축하합니다. 인사를 담당하는 관리가 합격증인 홍패를 주고나면, 왕이 급제자들에게 어사화와 술을 내려줍니다.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3일 동안 과거 시험을 담당했던 관리, 선배, 친척을 방문하며 인사를 올렸는데 이를 삼일유가라고 합니다. 급제자는 단령을 입고, 복두에 어사화를 꽂고서 말위에 오릅니다. 행렬을 가장 앞에는 붉은색 옷을 입은 천동이 앞장서고 그 뒤에 붉은 색 천으로 싼 홍패를 든 사람들이 뒤따릅니다. 그 뒤를 북, 장구와 같은 악기를 들고 연주를 하는 악공들이 행진합니다. 삼일유가를 구경하는 여러 사람들이 보이죠? 이렇게 삼일유가 행사는 백성들에게 과거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역할도 했습니다. 자료출처 : 문화체육관광부 국립전주박물관 - 교육 자료실
Q.  직지심체요절에 대해 질문드려요
안녕하세요. 김원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377년 고려 청주 흥덕사에서 고승이었던 백운경한이 쓴 책을 금속활자로 뜬 것이다. 이 경전은 학승들이 대교과(大敎科)를 마치고, 수의과(隨意科, 현재의 대학원 혹은 사회 학습)에서 공부하는 데 사용되는 학습서 역할을 했다. 그 후 행방은 알 수가 없다가 구한말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직지심체요절은 고려의 승려 백운경안 화상이 중국에서 가져온 요절을 재구성하여 엮은 책으로, 여러 선종 조사들의 어록과 게송이 주된 내용이다. 때문에 영어로는 'anthology'라고 번역됐다.이 책은 무심선(無心禪)이라는 특유의 선 수행법을 가르치고 있다. 이 방법은 무심무념으로 있으면서, 사람이 저마다 지니고 있는 깨달음(불성)이 자연스럽게 깨어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백운경한은 현대 한국 불교에서 주력으로 삼는 의심 기반의 간화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무(無)’·‘만법귀일(萬法歸一)’·‘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등의 화두를 유용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화두마저도 버릴 것을 권하고 있다. 이는 당나라 시대의 선풍을 되돌리기 위한 백운의 노력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직지는 각 상권, 하권의 2권으로 나뉘어 있는데 현재 프랑스에 있는 원본은 하권에 해당하며, 상권은 한때 현상금까지 내걸고 찾았지만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았다. 단, 이는 최초본의 상권이 실종되었다는 뜻으로, 직지라는 책의 텍스트 자체는 인쇄물의 특성상 오늘날에도 잘 남아 있다. 이후 간행된 목판본 직지는 완본이 제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청주고인쇄박물관의 주도 하에 그 내용을 바탕으로 금속활자본 직지 하권의 글자체와 판형을 본따서 2015년 상권 내용의 디지털 복원이 이루어졌고,# 복원된 상권을 보면 권말의 출간 연도도 二千十五年(2015년) 을미년 12월으로 인쇄되어있다. 이후 실물활자를 전통방식 그대로 다시 만들어 상권을 복원할 계획이다.인쇄 상태는 일반인이 보기에도 그다지 좋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선 직지를 찍어낸 활자는 주조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글자획의 굵기와 가늘기가 일정하지 않고, 어떤 글자는 기울어져 있고, 각 열이 곧지 못하고, 삐뚤빼뚤하고, 어떤 글자는 희미한데다가, 획수의 일부가 제대로 찍히지 않았으며, 어떤 데는 윗열의 글자와 아랫열의 글자의 획이 맞물려 있는 등 조잡한 오류가 많다. 이는 관청에서 제대로 된 거푸집을 사용해서 주조한 게 아니라, 민간 사찰에서 밀랍을 이용해 주조했기 때문이다. (박문열,『고인쇄출판문화사론』, 피아이, 1999. 참조)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이 문헌에도 일부 면에 구결이 기입되어있다. 순독구결이며 여말선초 구결의 전반적인 특징을 따라가고 있다.현재 남아있는 본은 1372년 제작이 시작되어 1377년에 간행되었다. 이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간행한 금속활자본 성경보다 78년 더 앞선다. 기록에 의하면 직지 이전에도 1234년 인종 시기의 '고금상정예문(상정고금예문)', 1239년 고종 시기의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같은 금속활자 인쇄물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나, 안타깝게도 소실되어 현대에 전해지지 않기에 인류에게 남아있는 것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 이 직지이다. 당시 고려의 발달했던 인쇄문화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산 중 하나이다.현재 남아있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후대에 목판으로 재간행된 목판본으로 알려져 있으나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공인본(보물 제758-2호)이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으로 판명되어 달라질 수 있다.# 2015년 진위논란이 일었던 증도가자는 '활자'고, 이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적어도 과거에는 실제로 존재했을 그 금속활자로 인쇄한 '문서'이므로 증도가자 유물의 진위 논란과 직접적 관련은 없다. 이 문서는 일단 최소한 가짜는 아니고 이미 심사를 거쳐 대한민국의 보물 758호로 지정되어있다. 다만 기존에는 목판본으로서 보물로 지정되어 있었는데 직지보다 앞선 금속활자본으로 결론날 경우 그 가치가 더욱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자료출처 나무위키 - 직지심체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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