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조선시대 성리학이 융성하였는데, 이기론 연구한 학자의 사상 및 이황과 이이의 업적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기론은 중국 남송대 이후 명·청대 그리고 조선조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조선조를 중심으로 전개유형을 보면 16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탐구되었다.그 이론 탐구의 중심 인물은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였다. 그들이 전개한 이기론의 특징은 우주의 존재와 생성에 관한 문제보다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심성정의 문제를 이기론적으로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중시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물론 이들에 앞서 이언적(李彦迪)의 ‘태극설’이나 서경덕(徐敬德)의 ‘일기장존설(一氣長存說)’, 더 소급해서 정도전(鄭道傳)의 『심기리편(心氣理篇)』, 권근(權近)의 『입학도설(入學圖說)』 등이 있다.그러나 이들의 이론 체계는 질·양의 면에서나, 사상사적 의미에서 이황·이이의 이기론 체계에 비교될 수 없다. 특히,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이황의 이기론적 탐구는 사상사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뜻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이황의 탐구는 비록 심성론에 한정된 부분적 연구에 불과하지만, 조선조 성리학으로 하여금 당시 중국의 성리학 수준을 능가할 수 있는 계기를 가져왔다. 또한 사단칠정의 이기론적 탐구를 계기로 비로소 조선조 성리학계에 문제 중심의 학파가 형성될 수 있었다.이른바 퇴계학파·율곡학파 또는 주리파(主理派)·주기파(主氣派)로 불리는 학파의 형성 역시 이황과 이이를 계기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한국 성리학의 전개 방향이 심성론에 대한 이들의 이기론적 해명에서 문제의 소재를 발견하고 그 이론 전개의 단서를 찾았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상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즉, 조선조 성리학은 문제 중심의 학파적 성격을 띠고, 독자적 명제를 제시하고 새로운 이기론을 전개한 것이라 하겠다.
Q. 고구려 시대의 교육기관 태학에 대한 질문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태학(太學)은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설치되었다. 같은 해에 전진(前秦)과 교류하여 불교가 들어왔기 때문에, 전진의 영향을 받아 태학이 설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태학은 중국 왕조의 유교 교육 기관 이름이기 때문에 진(晉)과 같은 중국 왕조의 교육 제도를 참조하여 설치했을 것이다.태학의 교육 내용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어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하지만 태학이 유교 교육 기관의 이름이었던 점으로 볼 때 유교 경전을 주로 가르쳤다고 여겨진다. 아울러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유교 경전인 5경(五經) 이외에도 『사기(史記)』⋅『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진춘추(晉春秋)』 등의 역사서, 『옥편(玉篇)』⋅『자통(字統)』⋅『자림(字林)』 등의 한자 관련 서적, 그리고 문학 작품인 『문선(文選)』 등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태학에서도 이 책들을 교육했을 것이다.태학이 설치된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371~384) 대는 왕권 중심의 정치 체제가 갖추어진 시기였다. 이에 소수림왕은 유교 정치사상에 입각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왕을 보좌하여 행정 업무를 수행할 관료들을 양성하기 위해 태학을 설치했던 것으로 보인다.태학에는 국자박사(國子博士), 대학사(大學士), 사인(舍人), 통사(通事), 전객(典客) 등의 관원이 속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