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세이노라는 필명의 작가가 있었는데 가르침이라는 책에서 추구하는 바가 뭔가요?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이노라는 필명의 작가는 일본의 작가이며, '가르침'이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이 책에서는 세이노 작가가 자신의 경험과 체득한 지혜를 바탕으로 삶에 대한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세이노 작가는 인생의 목적은 단순한 소유물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고 경험을 쌓으며,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는 자신의 역량과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세이노 작가는 또한,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돈과 성공에 대한 추구는 중요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삶은 돈과 성공뿐만이 아니라, 가족, 사랑, 친구, 문화, 예술 등 다양한 것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이 모여서 우리의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말합니다.따라서, 세이노 작가의 책 '가르침'에서는 돈과 성공에 대한 추구가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며, 인생에서 중요한 것들과 그것들을 어떻게 추구해 나가는 것이 좋은 삶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Q. 병을 낫게 하려고 불교의 약사불 앞에 절 올려 사대부를 놀라게 했다고 하는데, 조선에서 임금이 불상에 절은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일 아닌가요?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에는 유교사상이 국가사상으로 정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교의 약사불에 절을 한 것이 국가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신앙심에 따른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세종대왕의 경우, 불교의 약사불이 치유의 상징인 것이 아니라, 불교의 부처 중 하나인 보살의 화엄경에 나타나는 '불해보살'이라는 인물을 모신 불상이었습니다. 이러한 보살의 이면에는 불교의 대표적인 가르침인 '자비'와 '조화'라는 가치가 담겨 있었습니다. 따라서, 세종대왕이 불상에 절을 한 것은 개인적인 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의지와 함께, 국민의 건강과 복지를 위해 자비와 조화의 가치를 추구하겠다는 의지도 함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결국, 조선시대에는 유교사상이 국가사상으로 정착되어 있었지만, 불교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세종대왕의 불상에 대한 절은 그가 개인적으로 신앙심을 갖고 있던 것이며, 국민의 건강과 복지를 위해 불교의 가르침을 수용하겠다는 의지도 함께 담겨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Q. 역사 시대를 쭉 살펴보니 숙청의 역사 같은데, 필연적으로 어쩔 수 없나요?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사실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는 말은 많은 면에서 옳습니다. 역사를 기록하고 전달하는 과정에서는 그 시대를 이끌었던 권력자나 이익 그룹들의 시각과 이야기가 주로 전달되고, 그들이 이야기를 통제하거나 변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하지만 이러한 역사적인 한계와 모순들도 역사적인 연구와 논의를 통해 극복할 수 있습니다. 현재에는 다양한 시각과 이야기들이 논의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다양한 역사적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또한, 역사적인 사건은 대부분이 필연적으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인간의 선택과 행동들이 그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숙청이라는 사건이 일어난 것도 권력자들의 선택과 행동들이 쌓인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따라서, 역사적인 사건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며, 승자의 역사라는 것도 일부분은 맞을 수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인 사실들을 다양한 시각과 함께 다시 생각하고 다시 이해해 나가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조선시대 백성들은 신분상승의 기회가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에는 양반과 중인, 노비 등의 등급이 존재했는데, 이들의 사회적 지위는 대체로 고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도 신분상승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습니다.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공자식(功字式)이나 시험을 통한 고시 등을 통해 공부를 통해 합격하게 되면 양반으로 승진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신분상승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험은 양반의 자손에게만 허용되었으며, 일반 백성들은 참가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이 시험의 출제 범위나 문제 유형 등이 양반들의 이익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등의 불평등한 요소가 있었습니다.또한, 조선시대에는 재벌에 대한 규제가 적어, 상인이나 기술인 등으로서의 경제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이를 통해 신분이 오르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대체로 사회적 지위의 상승은 양반으로 승진하는 것보다는 한정적이었습니다.요약하자면, 조선시대에서도 양반의 자손이 아니더라도 시험을 통한 공부로 신분상승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나, 이에는 제한과 불평등한 요소가 있었으며, 다른 경로에서도 상대적으로 한정적인 신분상승의 기회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