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일반적으로 제삿날은 종교에 상관없이 돌아가신 당일에 지내나요?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제삿날은 종교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보통 한국에서는 그날에 드리는 경우가 많지만, 종교나 지역에 따라 다르게 관례를 지키는 경우도 있습니다.예를 들어, 기독교에서는 죽은 후 3일째인 제3일에 추도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불교에서는 죽은 후 49일째인 제49일에 사찰에서 성불법회를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죽은 후 첫째, 둘째 날에는 유족들이 장례를 준비하고, 셋째 날인 제삿날에는 유족들이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며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례도 문화나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죽은 사람의 가족이나 지인이 제삿날에 어떤 방식으로 제사를 지내는지에 대해서는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Q. 순장이라는 풍습이 있을 때 같이 묻히기 싫어하던 사람은 그냥 생매장을 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에는 순장(殉葬)이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는 죽은 사람의 부인이나 첩, 노비, 신하들이 그 사람과 함께 묻혀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 풍습은 왕실을 비롯한 상류층에서 행해졌으며, 특히 왕과 왕비, 왕자, 왕녀 등의 경우에는 그 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함께 묻혀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순장에 찬성하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묻히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생매장(生妻葬) 당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생매장이란, 죽은 사람의 부인이나 첩이 그 사람과 함께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부인이나 첩이 그 사람과 함께 묻히기를 원하지 않을 경우에 행해졌으며, 그들이 살아서 남아있을 경우 다른 남자와 다시 결혼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생매장은 비례적으로 덜 일어났으며, 이는 불법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발견되면 엄벌을 받을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묻히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생매장을 선택하는 대신 몸을 숨기거나 다른 방법으로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Q. 조선시대에 노비의 숫자가 갑자기 늘어난 이유는?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노비의 숫자가 갑자기 늘어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조선시대 초기에는 노비들이 일반적인 노동력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는 노비들의 권리와 자유가 상대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노비 제도가 비교적 유연하게 운영되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노비들의 권리와 자유가 점차 제한되면서, 노비들은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지위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조선시대 중기에는 대명법이 시행되면서 노비의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됩니다. 대명법은 국가에서 인구 조사를 실시하고, 거주지별로 인구를 분류하여 가족 단위로 노비를 지정하는 제도였습니다. 이로 인해 노비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노비 제도가 더욱 강화되고 노비들의 권리와 자유는 점차 제한되었습니다. 셋째, 조선시대 말기에는 전쟁이나 기근으로 인해 노비들의 숫자가 늘어난 것도 원인 중 하나입니다. 전쟁이나 기근으로 인해 농작물 수확이 어려워지면서, 많은 가난한 농민들이 노비로 팔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노비들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고, 노비들의 참담한 삶이 더욱 악화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Q. 임진왜란때 노비들이 왜군이 되어 싸웠다는말이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임진왜란때 노비들이 왜군이 되어 싸웠던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에는 노비들이 전쟁에서 노동력으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노비들이 상인, 농부, 공장 노동자, 군인 등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이들 중 일부는 군인으로서 대원으로 복무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도 이러한 노비들은 복무의 대상이 되어 군인으로서 싸웠습니다. 노비들이 군인으로서 싸우는 것은 그들의 자유와 권리가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강제로 이루어졌으며, 그들의 참전이나 희생에 대한 보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시대의 노비제도가 인정되지 않았던 시대적 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노비제도는 노비들에게 인간적인 존엄성을 부여해주지 않았으며, 그들은 주인들의 무참한 착취와 학살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비들이 군인으로서 참전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불공평하고 비인간적인 것이었습니다.
Q. 조선시대에는 하천및 도시가 오물천지 였다는데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에는 대부분의 도시와 하천이 오물천지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의 도시들은 현대와 달리 하수도 시설이나 쓰레기 처리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생활폐기물이 집단으로 쌓여서 오물천지가 되었습니다.이러한 오물천지는 식수와 환경, 건강에 매우 나쁜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물천지에는 잡귀, 쥐, 바퀴벌레, 파리 등 다양한 해충들이 서식하고, 오물에서 나는 악취나 유해가스 등은 인체에 유해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오물천지가 확대되면서 많은 지역에서는 홍수나 태풍 등의 자연재해로 인해 많은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조선시대 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대책을 시행했습니다. 예를 들어, 1447년에는 경복궁 근처에 청계천을 만들어서 오물천지를 개선하고, 15세기 중반에는 서울의 명동과 중동 일대에 첫 공공화장실이 설치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대책들은 전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실패하였고, 대부분의 도시와 하천은 20세기 초까지도 계속해서 오물천지로 남아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