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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정현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전문가입니다.

한정현 전문가
부산예술고등학교
Q.  양규장군이 이끈 흥화진 전투에서 거란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이 때(12월 16일) 큰 별똥별(유성)이 곽주에 떨어졌다는 내용이 있다. 우연한 천문 현상일 수도 있지만, 운 좋게도 운석이 곽주의 성곽에 떨어져서 피해를 줬을 가능성도 아주 없진 않다. 이 경우 공성측 병력이 수성측 병력의 1/3에 불과함에도 불가사의하게 공성에 성공한 점, 양규가 탈환한 곽주성을 요새화하지 않고 내부 주민들을 전부 대피시킨 점, 이후의 여요전쟁에 곽주성이 주요 전장으로 등장하지 않는 점 등이 이해될 수 있다.
Q.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는 실제로 이방원과 정몽주가 지은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하여가는 『해동악부(海東樂府)』 『포은집(圃隱集)』, 단심가는 『병와가곡집』 『청구영언』 『해동가요』 『가곡원류』에서 각각 이방원과 정몽주의 시조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Q.  임해군이 왕이 되지 못한 이유가 뭔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임해군은 장자이기에 세자가 되기에 더 유리했지만, 성품이 포악하고 여러 비리를 저질러 선조의 신임을 잃었고 결국 동생인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되었습니다.
Q.  조선통신사가 끊기게 된 이유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조반정 후 청나라가 건국되면서 조선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는 새로운 외교 관계 구축 즉, 청 중심 책봉 체제를 배제하고 독자적인 상호 연대 강화를 모색했다. 이러한 국제 환경 변화 속에서 통신사는 정례화되었고 대마도와 실질적인 통교를 위하여 문위행(問慰行), 팔송사(八送使), 차왜(差倭)제도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18세기 들어 대륙 정세가 안정되자 통신사 파견은 의례적인 형식이 짙어졌으며, 19세기 이후에는 외교적인 의미가 상실되어 1811년(순조 11) 대마도에서 국서를 교환하는 ‘역지통신(易地通信)’으로 조선통신사 파견은 끝이 난다.
Q.  은나라의 갑골문자에는 어떤 글이 써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거북이 등껍질과 동물 뼈에 새긴 갑골문자는 점에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면 사냥을 나가기 전에 신에게 “내일 비가 올까요, 안 올까요?” 물은 다음 “안 온다.” 이렇게 그 결과도 적었다. 다시 말해 갑골문은 점을 쳐서 나오는 점괘를 써둔 것이다. 또 사냥 나가기 전에 “소를 잡을까요, 못 잡을까요?”와 같이 점을 쳐 보기도 했다. 갑골문을 ‘점을 치는 문자’라는 뜻의 ‘복사(卜辭)’ 혹은 ‘점복(占卜)’ 문자라고도 한다. 그리고 은허(殷墟), 즉 상나라의 수도였던 은 지방의 유적지에서 주로 쓰인 문자라서 ‘은허문자’라고도 부른다. 갑골문에 쓰인 내용을 통해 기원전 11~14세기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갑골문자는 4500자 정도. 상형, 지사, 회의, 형성 등 한자의 원리가 갑골문에도 있는 것으로 보아 명실상부한 한자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의 한자와 모습이 비슷한 ‘물 수(水)’, ‘비 우(雨)’ 등의 갑골문이 거북이 등껍질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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