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이순신장군이 거북선을 만든 계기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간에는 이순신이 직접 철갑선인 거북선을 개발했고 직접 탑승했을 거라는 통념이 있으나, 사실 조선 수군의 주력은 판옥선이고 이순신도 거북선을 처음 개발한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 일반적으로 알려진 거북선으로 개량한 건 이순신이다.고려말 조선초에는 한반도의 혼란을 틈타 왜구의 침략이 극심했으며 태조 이성계도 지리산까지 올라온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적 있다. 세계 최초의 화포 무장 함대인 최무선의 누전선-맹선-판옥선 테크트리에서 보여지듯 조선 수군의 전선의 발전은 왜구의 계속해서 발전하는 해적선에 대항하기 위해 시대적으로 불가피했다. 이순신의 거북선 177년 전인 태종 13년에 언급된 거북선 또한 당시 만들어진 실험적인 전선이었으며, 이후 이어지지 않은 걸 보면 효용성이 떨어지는 불완전한 함선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최초로 실용적인 거북선을 개발하도록 지시하고 해전에서도 거북선을 운용한 건 이순신이다.기존 조선 수군의 주력함이었던 판옥선을 개량한 것으로, 지붕을 덧씌워 방어력을 높이고 포문을 많이 설치하여 사격 공격을 용이하게 하도록 구조를 변경, 앞에는 용머리 형태의 충각 겸 포문을 달아 돌격전에도 용이하게 설계되었다.당시 일본 수군의 전술은 배에서 직접 사격 공격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동성이 빠른 소형 배를 타고 적함에 난입하여 근접전으로 배를 뺏거나 횃불을 던져 태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옻칠한 나무 지붕에 쇠못을 빼곡하게 박은 거북선에는 상륙 자체가 불가능하여 통하지 않았고, 거기다가 근접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의 화력으로 적함을 격침시켰기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에는 말 그대로 해상 요새 수준의 위용을 자랑했다.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에는 전라 좌수군 방답진에 소속된 방답 귀선, 전라 좌수영 본영에 소속된 영귀선, 통제영 창설 이후 건조된 통제영 귀선의 3척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원균의 칠천량 해전 당시 모두 침몰했다.
Q.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어떻게 권력을 잡았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승리히데요시가 ‘가라이리(중국 입성)’를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켰을 때 이에야스는 규슈 나고야 성에 머무르며 조선에 출진하지는 않았다. 후일 조선과 외교관계를 재개하고자 할 때 일본 측에는 이 점을 내세웠다. 히데요시의 말년에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정권의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5대로(五大老)의 필두로 활약했으나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1595년에 다이묘 간 혼인을 금지한 히데요시의 지시를 깨고 다테 마사무네, 그리고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혼인관계를 맺어 세력 확대를 도모했다. 이로 인해 이에야스의 행동을 비난하는 다른 네 명의 대로(大老)와 도요토미 정권의 행정실무 최고 담당자인 5봉행(五奉行)의 필두격인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대립이 격화되었다.당시 히데요시 가신단은 무단파와 문치파로 갈라져 대립했다. 가토 기요마사로 대표되는 무단파는 독립적 성향의 영주로서 자신의 영지를 지키는 데 관심이 있었다. 이시다 미쓰나리로 대표되는 문치파는 행정관료적 성향이 강해 도요토미 정권이 이룩한 중앙 기구에 권력이 집중된 정치 체제를 유지하려고 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영주 계급의 독자적 이익 추구라는 면에서 미쓰나리보다는 이에야스와 통하는 점이 있었다. 히데요시 가신단이 둘로 분열된 것은 이에야스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1600년 10월, 지금의 기후 현에 위치한 세키가하라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기요마사 등은 미쓰나리의 서군을 적대시하고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미쓰나리는 서국의 모리 데루모토를 총대장으로 내세웠으나 데루모토는 오사카 성에 머무르고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더욱이 서군의 주력이었던 히데요시의 조카 고바야카와 히데요키가 배신하여 서군의 측면을 갑자기 공격했다. 이로 인해 일거에 전열이 무너진 서군은 궤멸되었고 전투는 동군의 승리로 끝났다.이 전투를 계기로 이에야스는 사실상 패권을 확립했지만 세키가하라에서의 승리는 무단파 도요토미 가신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에야스는 곧바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제거하지 못하고 좀 더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가토 기요마사 등은 평소 사이가 나쁜 미쓰나리를 제거하는 전투에는 참가할 수 있지만, 이에야스가 히데요리를 친다면 여기에는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히데요시의 흔적을 지우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이에야스는 차근차근 순서를 밟아 나갔다. 이 과정에서 인내의 화신이란 이에야스의 이미지가 만들어지지만 이처럼 실제로는 어쩔 수 없이 ‘인내’한 측면도 없지는 않았다.쇼군 서임과 오고쇼 시대1603년 이에야스는 고요제이 천황에게서 쇼군으로 임명받고, 1605년 쇼군직을 아들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물려주었다. 이를 통해 히데요시의 아들이 다시 무사 수장으로 될 가능성이 사라졌음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이에야스 자신은 오고쇼(물러난 쇼군)가 되어 1607년 슨푸에 머무르며 조정 · 사사와 관련된 문제, 외교 및 화폐와 교통 등 전국적인 정책을 다루고, 일상적인 정치는 에도 막부에서 처리하게 했다. 이를 오고쇼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이에야스가 처음 만든 것이 아니고, 노부나가도 자신의 직위를 적자인 노부타다에게, 히데요시도 조카 히데쓰구에게 물려주고 실권을 행사한 사례가 있었다.1611년에는 오사카 성에 있던 히데요리를 교토 이조 성으로 불러 회견했는데, 이 의례를 통하여 히데요리가 이에야스의 휘하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회견 직후 서국 다이묘에게 3개조 법령을 지시하고 이를 준수한다는 맹세문을 제출하도록 했다. 이에야스는 혹시 모를 반항의 싹을 완전히 뿌리 뽑고자 했다.
Q.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은 무엇을 하는 직책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순서대로 나열했습니다.영의정1400년(정종 2) 4월 관제를 개혁할 때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의정부(議政府)로 개편하고, 그 최고 관직을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라 하여 정1품관으로 보(補)하고 백관(百官)과 서정(庶政)을 총관장하게 하였으며, 그 밑의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과 함께 3의정이라 하였다. 별칭으로는 영상(領相) ·영각(領閣) ·수규(首揆) ·영규(領揆) ·원보(元輔) 등 많았으나, 특히 영상으로 불렸다.영의정은 좌 ·우의정, 동의정부판사(同議政府判事) 등을 합쳐 5명의 원로대신이 합좌(合坐)하여 외교문서나 고열(考閱)하고, 사형수를 복심(覆審)하는 정도의 실권없는 직위였다. 1436년(세종 18) 세종은 3의정이 국가의 최고 원로이면서 국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정승을 둔 취지에 어긋난다 하여 6조(曹)에서 각기 맡은 일을 먼저 의정부에 품의하고, 의정부에서는 그 가부를 상의 계문(啓聞)하여 임금의 전지(傳旨)를 받아서 6조에 회송, 행정을 집행하게 하는 의정부의 서사(署事)제도를 실시하여 권한이 강화되었다. 이전에는 좌 ·우의정이 총리로서 모든 공무를 총관하였으나 이 때에 이르러 영의정도 서사에 참여하여 영의정이 총리가 되었다.이로부터 3의정을 삼공(三公) ·삼정승(三政丞)이라 하였다. 다만 이조(吏曹) 및 병조(兵曹)의 인사임명과, 병조의 군사 동원, 형조(刑曹)의 사형수 이하의 죄수에 대한 사항 등은 각 조에서 임금에게 직접 보고 시행하였으므로 의정부에서는 이에 간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세조(世祖)가 즉위하여 의정부의 서사를 폐지함에 따라 영의정의 막강한 권력은 다시 실권없는 무력한 지위로 전락하였는데 이는 단종(端宗) 때에 수양대군의 정적(政敵)이었던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이 영의정 ·좌의정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여 자기의 행동을 크게 제약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그 뒤 성종(成宗) ·중종(中宗) 때에 여러 번 의정부의 서사제를 회복하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다시 회복하지 못하였고, 명종(明宗) 때 비변사(備邊司)를 설치하여 나라의 중대사를 심의하게 되면서부터 3의정은 도제조(都提調)로서 참여하기도 하였다.영의정은 비록 권한이 약화된 직위였다 하더라도 정부의 수반(首班)으로서, 조선시대의 최고관직으로 존속되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의정부의 총리대신(總理大臣:勅任官)으로 명칭이 바뀌고, 이후 내각 총리대신 ·의정 등으로 개칭되었다.좌의정영의정의 아래, 우의정의 위로, 백관(百官)을 통솔하고 일반 정무(政務)와 외교관계 등의 일을 처리 운영하였다. 1401년(태종 1) 문하부(門下府)를 혁파하고 의정부를 설치하면서 문하부의 좌 ·우정승을 의정부의 좌 ·우정승으로 하였다가 1414년(태종 14) 의정부판사(議政府判事)로 고쳐 정원 2명을 두었는데, 같은해에 좌 ·우의정으로 나누어 개칭, 처음으로 좌의정이라는 관명이 생겼다. 좌의정에게는 좌정승(左政丞) ·좌상(左相) ·좌규(左揆) ·좌합(左閤) ·좌승상(左丞相) 등의 별칭이 있었으며, 영의정 ·우의정과 함께 삼정승 ·삼의정 ·삼공(三公) 등으로 합칭(合稱)되었다.우의정우상(右相)·우정승(右政丞)·우대(右臺)·우합(右閤)·우규(右揆)·단규(端揆) 등이라고도 한다. 백관(百官)을 통솔하고 서정(庶政)을 총리한 최고행정기관인 의정부를 이끈 3의정(三議政)의 하나이다.1414년(태종 14) 초기의 의정부판사 2명을 좌·우의정으로 나누면서 처음 명칭이 생겼으며,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관제가 개혁될 때까지 480년간 존속하면서 국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의정부의 서사(署事)제도가 있을 때 영의정·좌의정과 함께 합좌(合坐), 육조로부터 올라온 모든 공사(公事)를 심의하여 국왕의 재가를 받아 6조에 회송하여 행정을 집행하게 하는 권한을 지녔다.경연영사(經筵領事)·춘추관감사(春秋館監事)·홍문관영사(弘文館領事)·예문관영사(藝文館領事), 세자부(世子傅)와 비변사(備邊司) 도제조(都提調)도 겸임하였다. 영의정·좌의정과 더불어 3의정·3정승·삼공(三公)이라 부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