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 차이점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영조의 탕평책은 소극적인 탕평책으로 자신을 등극하게 만든 노론 세력들로부터 왕권을 지켜내기 위한 저항의 성격을 가집니다.영조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했으며, 붕당의 근거지로 변질 된 서원을 대폭 정리했습니다. 또한 붕당끼리의 자리 싸움을 없애기 위해 이조 전랑의 권학을 축소였습니다.또한 탕평책을 바탕으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먼저 균역법을 시행하여 백성의 군역 부담을 2필에서 1필로 줄였으며,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삼심제를 실시하였으며, 신문고 제도를 부활 했습니다.정조의 탕평책은 적극적인 탕평책으로 실용 사상을 가지고 능력만 있다면 서자 출신이라도 중앙요직에 등용하여 실사구시에 입각한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정조는 외척과 환관 세력을 제거하고 노론, 소론, 남인을 골고루 등용합니다.정조의 개혁 정책을 살펴보면 규장각(왕의 정책 자문 기구)을 설치하여, 장용영(왕의 친위 부대)을 창설했습니다. 또한 젊은 관료들을 재교육하는 초계문신제를 시행했습니다. 서얼 출신 학자들을 규장각 검서관에 기용하고, 노비에 대한 차별을 완화했다고 합니다.제 답변이 도움이 되셨다면 ‘추천’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감사합니다.
Q. 해인사에 가면 팔만대장경이 봐관중인데요?
안녕하세요. 네 그렇습니다.고려 고종 23년(1236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크게 화를 입은 고려는 호국불교의 힘으로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팔만대장경 입니다. 조선 태조 7년(1398년) 강화도 선원사에서 서울에 있는 지천사로 임시로 옮겨 모셨던 팔만대장경을 경남 가야산 해인사로 이송할 때 행렬의 맨 앞에는 향로를 든 동자가 길을 안내하고, 대장경판을 조심스레 포장해 남자들은 지게에 지고 여자들은 머리에 이고, 소달구지에 실고, 그 뒤를 수많은 스님들은 독경을 하며 뒤따르면서 남으로 남으로 내려갔다고 합니다.팔만대장경을 만든 과정도 그러했지만 이송한 과정 역시 불가사의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합니다.태조가 팔만대장경을 강화도에서 합천 땅으로 옮긴 이유는 몽골군의 침략과 왜구의 잦은 노략질로 대장경을 가장 안전한 곳에 보관하려고 했는데 바로 그 곳이 합천의 해인사였다고 합니다. 해인사가 있던 가야산은 신령스러운 명산으로 여겨 팔만대장경을 온전히 보전해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제 답변이 질문자님께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