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삼봉집은 어떤 책이었나요???
『삼봉집』은 1397년(태조 6) 정도전이 살아 있을 때 그의 아들에 의해서 2권으로 처음 간행되었다. 그 뒤 1465년(세조 11) 그의 증손에 의해서 6책으로 중간되고, 다시 1486년(성종 17) 8책으로 증보되었다.그러나 지금 전하는 『삼봉집』은 1791년(정조 15)에 왕명으로 다시 간행한 책으로서, 구본(舊本)에 누락된 진법(陣法)과 시문을 수록했으며, 정도전의 사실(事實)에 대한 기록을 보완하고 편차를 다시 분류해 14권 7책으로 만든 것이다. 여기에는 권근(權近)의 서(序)와 신숙주(申叔舟)의 후서(後序)가 들어 있으며, 성석린(成石璘)이 시운을 뽑고, 권근이 전편에 걸쳐서 비점(批點)과 교정을 하고 주석도 붙였다.이 책의 내용을 순차에 따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4권에는 시(詩)·부(賦)·사(詞)·악장·소(疏)·전(箋)·서(序)·기(記)·잡문이 수록되어 있다. 시문은 한결같이 애국애민의 충정이 담긴 것이 특징이며, 무인적 기백이 곳곳에 드러나 문무 겸비의 인물됨이 다른 성리학자와 구별된다.5·6권에 수록된 『경제문감』(상·하)은 1395년(태조 4)에 제진(製進: 임금의 명에 따라 찬술함)한 글로서, 중국 역대의 재상(宰相)·대간(臺諫)·위병(衛兵)·감사(監司)·수령(守令) 등의 연혁과 직무 등을 서술하였다. 여기에서는 재상·대간·위병·감사·수령의 직책을 강화해 중앙집권체제의 실효를 거두는 것이 위정의 요체임을 강조하였다.7·8권에 수록된 『조선경국전』(상·하)은 『경제문감』보다 1년 앞선 1394년(태조 3)에 제진한 것으로서, 『주례(周禮)』의 육전 체재를 모델로 하여 조선의 현실에 맞게 조정한 법전이다. 앞머리에는 왕위 계승과 국호 제정의 원칙을 설명하고, 다음에는 치전(治典)·부전(賦典)·예전(禮典)·정전(政典)·헌전(憲典)·공전(工典)의 순으로 치국의 대요를 기술하였다.치전에서는 특히 재상의 직책과 고시 제도(考試制度)에 의한 관리 임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부전에서는 국리(國利)·민복(民福)이 조화된 수취 체제의 강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예전에서는 유교적 사회 질서의 안정과 교육과 언론의 확대, 그리고 우호선린의 사대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정전에서는 문무일치와 병농일치에 입각한 국방 강화의 원칙을 제시했으며, 형전(刑典)에 해당하는 헌전에서는 덕치주의적 형벌 제도의 원칙을 강조하였다. 공전에서는 사치 억제와 민력(民力)의 축적이 수공업이나 토목 공사의 요체임을 제시하였다.9·10권에는 정도전의 철학 사상을 담은 『불씨잡변(佛氏雜辨)』과 『심기리편(心氣理篇)』·『심문천답(心問天答)』이 실려 있다. 대부분 성리학의 철학적 우위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도교와 불교를 비판한 글이다.특히, 『불씨잡변』은 불교의 교리를 「윤회」·「인과」·「심성」·「지옥」 등 10편으로 나누어 조목조목 비판하고, 그 사회적 해독까지 지적해 일대 정신 혁명을 시도하고, 나아가 승려들의 정치 간여를 막기 위해 쓴 것이다. 여말선초 유학자들의 불교 비판 중에서 『불씨잡변』은 가장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11·12권에는 1397년(태조 3)에 쓴 『경제문감별집』(상·하)이 실려 있다. 이 책은 앞서 쓴 『경제문감』이 신하의 직분만을 다룬 한계성을 극복하고, 군주의 치도(治道)를 정리하기 위해 중국과 고려 역대 왕의 치적을 기술한 것이다. 특히, 고려 역대 왕의 치적에 대한 서술은 이제현(李齊賢)과 사신들의 사찬(史贊)을 채록한 것으로 사서의 성격을 띤다.그리고 이 책의 말미에는 「경제의론(經濟議論)」을 첨가해 『주역』의 괘상(卦象)에 나타나 있는 군주의 치덕을 차례로 서술했는데, 주로 정호(程顥)의 『주역집전설(周易集傳說)』을 채록한 것이다. 그러나 그 중 태반이 탈락된 채 일부만이 전한다.13권에는 진법(陣法)과 습유(拾遺)가 들어 있다. 정도전은 원래 병법가로서도 일가를 이루어 이미 「팔진삼십육변도보(八陣三十六變圖譜)」·「오행진출기도(五行陣出奇圖)」·「강무도(講武圖)」 등의 병서를 짓기도 했다.그런데 「진법」은 이것들을 더욱 발전시켜 요동 정벌 운동에 직접 응용할 목적으로 지은 것이다. 내용은 『주례』의 수수법(蒐狩法)과 중국 역대 명장들의 병법을 참고해, 진치는 방법, 지휘관의 통솔 방법과 군법·공격·방어 방법 등을 자세히 설명하였다.「습유」는 『고려사』·『동국여지승람』 등에 실려 있는 정도전의 유문(遺文: 생전에 남긴 글)을 수집한 것으로, 표(表)·전(箋)과 같은 중요한 문서가 들어 있다.14권 부록에는 정도전의 일생 경력에 관계되는 자료를 널리 모은 「사실(事實)」과, 정도전에 대한 후세인들의 평을 모은 「제현서술(諸賢敍述)이 실려 있다.출처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619
Q. 음력과 양력을 사용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음력과 양력의 사용 이유는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인 배경에 기인합니다.음력은 달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한 달력 체계입니다. 과거에는 천체의 운동을 관찰하여 일정한 주기를 발견하고, 이를 달력으로 활용하였습니다. 예로는 한 달의 변화와 농경과 연관된 정월 대보름과 같은 음력 행사가 있습니다. 또한, 음력은 많은 아시아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종교적인 행사와 연관된 날짜를 결정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습니다.반면, 양력은 태양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한 달력 체계입니다. 양력은 로마 시대부터 사용되었으며, 그리스 로마 문화의 영향을 받은 서구 문화권에서 주로 사용됩니다. 양력은 계절 변화와 관련된 날짜를 정확하게 표시할 수 있어 농경, 학교, 정부, 국제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양력을 법정 달력으로 채택하여 일정을 관리하고 시간을 표시합니다.한국은 음력과 양력을 모두 사용하는데, 이는 역사적인 배경과 문화적인 전통에 기인합니다. 음력은 과거의 중요한 행사와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양력은 국제적인 표준과 시간 표시에 사용되는 현대적인 체계입니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양력과 음력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사용하여, 문화적인 행사와 일정, 시간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Q. 바로크 건축 양식과 고딕 건축 양식의 가장 큰 미술사적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바로크 건축 양식과 고딕 건축 양식은 미술사적으로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구조와 형태: 고딕 건축은 높은 천장과 가느다란 창문, 세로적인 구조를 특징으로 합니다. 산호식 고딕 아치와 비늘처럼 겹겹이 쌓인 첨탑 등 고유한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바로크 건축은 세련된 곡선과 타원형을 사용하며, 활짝 열린 공간과 복잡한 장식이 특징입니다. 대규모 건축물에서는 대칭성과 기하학적인 형태가 강조됩니다.장식과 디테일: 고딕 건축은 섬세한 활자로 조각된 화려한 장식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갖추고 있습니다. 높은 천장과 세련된 비롯한 세부 요소들이 중요한 디자인 요소입니다. 반면에 바로크 건축은 곡선적인 형태와 장식을 강조합니다. 미로같은 형태의 공간과 과장된 프레스코벽화, 정교한 스테라토프 등이 특징입니다.목적과 분위기: 고딕 건축은 종교적인 목적과 경건한 분위기를 강조합니다. 대성당과 교회 등 종교 건물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성스러운 느낌을 주는 디자인과 장식이 특징입니다. 바로크 건축은 궁전, 극장, 국회 등과 같은 세속적인 목적의 건물에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화려하고 고귀한 분위기와 규모가 큰 건물을 위해 설계되었습니다.이러한 차이점들은 바로크 건축과 고딕 건축이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적인 배경에서 발전하였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각 양식은 그 시대의 정치, 종교, 예술적인 영향을 받아 독특한 특징을 갖추게 되었으며, 미술사적인 차이점으로 구별되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Q. 남자는 머리를 짧게 하고 여자는 머리를 기르는 문화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
흥미로운 질문이군요, 이런 질문 좋습니다 답변자로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남자는 머리를 짧게 하고 여자는 머리를 기르는 문화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발전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정 시기와 장소에서 이러한 관행이 자리잡게 된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작용한 것으로 생각됩니다.실용성: 짧은 머리는 관리가 간편하고 청결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군대나 업무 환경에서는 규율과 위생상의 이유로 짧은 머리 스타일이 선호되었습니다.사회적 기준: 남성들이 짧은 머리를 가지는 것이 남성성과 근면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특히 군사 문화나 현대 사회에서 남성들은 남성다움의 상징으로서 짧은 머리 스타일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패션 트렌드와 사회 변화: 패션과 사회적 변화의 영향도 작용할 수 있습니다. 특정 시기에는 긴 머리 스타일이 유행하며, 다른 시기에는 짧은 머리 스타일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러한 트렌드 변화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와 관련이 있으며, 예술, 엔터테인먼트, 스포츠 등의 영향도 받을 수 있습니다.또한, 성별에 따른 머리 스타일 차이는 지역, 문화, 종교적인 영향도 받을 수 있습니다. 각 문화와 관습은 다양하며, 다양한 사회적 요인들이 상호작용하여 남성과 여성의 머리 스타일 차이가 형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문화적인 관행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변화하였고, 현재의 트렌드와 관습은 그 시대의 사회적인 변화와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