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조선시대 서얼은 중인보다 대우받았나요?
안녕하세요. 김선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사회에서 서얼은 "세오르다"라는 의미의 '서얼'이라는 말로, 양반 계층의 출신이지만 직위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양반 사회의 일부로서 양반의 기본적인 권리를 누릴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농사를 짓거나 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양반 사회는 양반 계급과 서얼 계급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들은 각각 고위 공무원인 양반과 일반 양반을 의미합니다. 이 두 계층은 서로 다른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양반은 정부의 고위 직위를 맡을 수 있었지만, 서얼은 그런 직위를 맡을 수 없었습니다.한편, 중인은 농민, 장인, 상인 등의 평민 계층을 의미합니다. 서얼은 중인보다는 더 높은 계층에 속했으며, 사회적 지위와 대우 면에서도 중인보다 우월했습니다. 그러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중인과 비슷한 활동을 하기도 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생활 수준은 경우에 따라 다를 수 있었습니다.따라서 일반적으로는 서얼이 중인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았지만, 그들의 실질적인 생활 상황은 그들의 개인적인 재산, 능력, 환경 등에 따라 크게 다르기 때문에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Q. 다른 나라 언어에도 한국어처럼 이상, 이하, 초과, 미만 등의 표현이 있나요?
영어:초과: more than, over미만: less than, under이상: at least이하: at most, up to일본어:초과: 超(こえ)미만: 未満(みまん)이상: 以上(いじょう)이하: 以下(いか)독일어:초과: mehr als미만: weniger als이상: mindestens이하: höchstens중국어:초과: 超过미만: 未满, 不足이상: 以上이하: 以下
Q. 금속활자 인쇄술의 발명은 고려시대의 지식 대중화에 어느정도 기여했는지 궁금해요.
금속활자 인쇄술은 고려시대에 큰 혁신이었으나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제한적인 생산능력으로 인해 지식 대중화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첫째로, 고려시대는 사회적 계층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교와 연관된 사상을 공부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문해력을 가진 사람들이 적어서 대중에게 글을 전파하는 것이 어려웠고, 따라서 금속활자 인쇄술이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습니다.둘째로, 초기의 금속활자 인쇄 기술은 아직 초기 단계였으며 매우 느렸고 비효율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책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어려웠고, 이로 인해 책의 가격이 높아 대중에게 널리 퍼지지 못했습니다.하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금속활자 인쇄술은 한국의 학문과 사상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나 불교 경전의 복사에 활용되어 불교의 확산과 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그러므로 고려시대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바로 대중화에 기여한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지식의 전파와 보존에는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장기적으로 봤을 때 지식 대중화의 기반이 된 것이며, 이후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야 서적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며 진정한 지식 대중화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더불어서 청주 박물관에 있는 "직지심체요절" 이라는 세계최초의 금속 활자도 존재합니다.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직지심체요절'은 금속활자 인쇄의 중요한 예로서 종종 언급됩니다. 이 책은 고려 시대의 불교 문화와 학문의 발전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직지심체요절'은 1231년에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유럽의 구텐베르크 활자보다 약 200년 이상 앞서는 것으로, 이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이용해 제작된 책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이 작품은 고려시대의 문화와 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이를 통해 고려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 기술을 도입한 국가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 시기에는 아직 인쇄 기술이 초기 단계에 있어 대량 생산이 어려웠고, 사회적 계층 구조와 교육 수준 등의 이유로 지식의 대중화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하지만 이러한 초기 작품들은 향후 지식의 대중화에 중요한 기반을 제공하였고, 고려와 이후의 조선 시대에서 보다 세련된 인쇄 기술의 발전을 이끌어냈습니다.
Q. 철학 관련 도서에 보면 자주 나오는 사자성어입니다. '와신상담(臥薪嘗膽)' 사자성어의 뜻은 무엇일까요?
알록달록동그라미417님 안녕하세요. 사자성어 '와신상담(臥薪嘗膽)'에 대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와신상담'은 '와(臥)'가 눕다, '신(薪)'이 장작, '상(嘗)'이 맛보다, '담(膽)'이 쓸개를 뜻합니다. 직역하자면 '장작 위에 누우며 쓸개의 맛을 맛보다'인데요, 이것은 말 그대로의 뜻이 아니라 뜻깊은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이 사자성어는 고구려의 명장 근초고왕이 여진족에게 패배한 뒤로 쓸개를 가슴에 물고 장작 위에서 잠을 자며 굴욕을 씻어내고 나라를 되찾기 위한 각오를 다짐한 이야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즉, '와신상담'은 어려움을 겪었던 과거를 잊지 않고 항상 그 굴욕을 명심하며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격언입니다. 때문에 이것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려움을 감수하고 끈질기게 노력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곤 합니다.
Q. 우리나라의 천문관측대는 언제 처음 만들어졌나요?
보람찬반달곰298님 안녕하세요. 김선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에 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천문 관측 대장비는 장영실이 성종 13년인 1442년에 제작한 '혼천의'로 알려져 있습니다. '혼천의'는 천문기구 중 하나로,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이후 장영실은 세종대왕의 훈령으로 1442년부터 1444년까지 세종과 함께 천문과 관련된 다양한 기구들을 제작하였고, 그 중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등은 장영실의 주요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그러나 이들 기구는 천문학적인 관측을 위해 개별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지, 현대적 의미의 천문관측대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현대적 의미의 천문 관측대로는, 1924년에 건설된 보스턴 천문대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것은 일제강점기에 세운 것으로, '경성천문대'라고 불리었습니다. 현재는 경희대학교 내에 위치해 있으며,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현대적 의미의 천문관측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런 천문관측대나 기구들은 주로 천체의 움직임을 추적하고 측정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이를 통해 천문학적 지식을 쌓고 달력 제작 등에 활용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