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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4

조선 시대 토관제도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조선시대에 있었던 토관제도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토관제도를 실시한 이유와

시대적배경이 그 당시 어떠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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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평안도·함경도·제주도 등지의 토착인에게 주었던 특수 관직입니다.

    고려 초기의 향직에서 유래된 것으로, 고려 말기에 평양·화주·제주도에 두었다. 조선 초기에는 설치 지역이 확대되어 평안도의 영변·의주·강계, 함경도의 길주·경성·회령·부령·종성·온성·경원·경흥 등에도 설치되었다. 세조 때에는 경주·전주·개성 등에도 두었으나 오래지 않아 폐지되었다.

    토관의 조직 구조는 동반과 서반으로 구분되어, 동반은 지방행정의 실무를 맡고 서반은 군사를 담당하였다. 동반 관서에는 도무사(都務司)·전례서(典禮署)·4부(四部)·영작서(營作署)·제학서(諸學署)·전주서(典酒署)·사옥국(司獄局)·사창서(司倉署)·수지국(收支局)·융기서(戎器署) 등을 두어 각각 사무를 맡게 하였다.

    서반의 군사 조직은 함흥부에 진북위(鎭北衛), 평양부에 진서위(鎭西衛), 영변대도호부에 진변위(鎭邊衛), 경성도호부에 진봉위(鎭封衛), 회령·경원 도호부에 회원위(懷遠衛), 종성·온성·부령·경흥도호부에 유원위(柔遠衛), 강계도호부에 진포위(鎭浦衛) 등을 두었다. 토관은 이남 6도의 향리에 비유되면서도 정5품 이하의 체아직(遞兒職)으로 관직이 주어졌다.

    토관이 중앙 관직을 받을 때에는 1품을 낮추기로 되어 있으며, 선발에 있어서 동반 토관은 관찰사, 서반 토관은 절도사가 본도인으로 추천해 임용하였다. 임용된 자는 천호(千戶)·백호(百戶)·진무(鎭撫)·영사(令史)·육방(六房) 등 그 지방의 군사적·사회적 유력층으로서 익군(翼軍)의 고위 지휘관이나 지방 행정의 실무자 중에서 선발되었다.

    중앙 정부는 변경지방의 토착적인 유력층을 포섭해 안으로는 효율적인 지방 지배와 군사 조직의 강화를 꾀하고, 밖으로는 이민족과의 연결을 방지하고자 한 회유 정책에서 토관제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15세기 말에는 그 정치적·군사적 사명을 다하고 향리로 대체되어 갔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토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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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세종 때 실시한 관리 임명 제도. 4군 6진 개척으로 두만강 일대의 영토를 차지한 후 남방의 백성들을 북방으로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였다. 그 후 이곳의 백성들을 다스릴 지방관이 필요함에도 한양에서 함경도 지방으로 가려는 관리가 없자 국가에서 고려 시대의 사심관 제도와 성격이 같은 토관 제도를 실시하였다. 즉 그 지방 사람을 그 지방의 관리로 임명하는 것이다. 조선 시대 관리 임명 원칙은 그 지방 사람을 그 지방에 관리로 임명하지 않는 상피 제도였으나 세종 때 임시로 토관 제도를 실시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토관 제도 [土官制度]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2001. 12. 10., 황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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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5.15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세종 때 실시한 관리 임명제도로, 4군 6진 개척으로 두만강 일대의 영토를 차지한 후 남방의 백성들을 북방으로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실시했고 후 이곳의 백성들을 다스릴 지방관이 필요함에도 한양에서 함경도 지방으로 가려는 관리가 없자 국가에서 고려시대의 사심관 제도와 성격이 같은 토관제도를 실시했습니다.

    그 지방 사람을 그 지방의 관리로 임명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관리 임명 원칙은 그 지방 사람을 그 지방에 관리로 임명하지 않는 상피제도였으나 세종 때 임시로 토관제도를 실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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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토관제도...

    이는 조선이 북진정책으로 인해 얻게 된 지역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만든 제도입니다.

    세종때 김종서와 최윤덕 장군에 의해 국경이 두만강 유역까지 확대가 됩니다.

    당시 여기에 살던 토착민은 여진족이었는데, 이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여진족 중에서 조선에 충성하고(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주민들의 저항을 최소화 시킬 수 있는 자를 관리로 임명하는 제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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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토관 제도는 고려 말, 원나라로부터 수복한 지방을 통치하기 위하여 처음 설치되었다고 합니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평양과 영흥, 그리고 제주도에 설치하였으며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때 본격적인 북방 개척이 실시되면서 평안도와 함경도 여러 군현에 설치되었다고 합니다. 새로 얻은 영토를 계획적으로 통치 하기 위해서 이러한 제도를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토관의 업무는 현재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 다고 합니다. 다만 . 무반의 경우는 군사적인 방어 업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이며, 문반의 경우는 지방의 행정 실무를 담당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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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토관 제도는 원의 직속령이었다가 다시 고려에 수복된 지방을 통치하면서 비롯되었다. 원은 점령한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그 지방 세력을 포섭해 통치했으며, 이를 수복한 고려도 지방 세력의 효율적인 조종을 위해 토관을 설치하여 지방 사회를 운영했다. 즉 새로 확보된 지역의 유력한 지방민을 통해 지방 지배를 꾀하는 동시에, 그 지방 민호를 군호로 편성해서 유사시에 군사적 요층지로 활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토관 제도는 조선에 들어와서도 계속 시행되었다. 함경도에는 1416년(태종 16) 이전 함흥에 토관이 설치되었다. 세종 때는 북방 지역에 대한 개척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그곳에 대한 통치 방식의 하나로 토관 제도를 확대 시행했다. 토관은 국가에 봉사한 대가로 지록이라는 토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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