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기록 상 이장현의 일생이 궁금합니다
드라마 연인이 실존 인물 기반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역사 기록 상 이장현의 일생 자세하게 궁금합니다 작은 거라도 좋으니 아시는 분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장현은 조선후기 인종-숙종 때의 한학역관이자 반청운동가로, 역관의 신분을 이용해 첩자, 교섭자, 무기밀매책으로도 활동했습니다.
희빈 장씨의 아버지 장형의 사촌형으로 1694년 2차 왕비 교체로 종질녀 희빈 장씨가 왕비에서 후궁으로 강봉된 가운데 1차 왕비 교체 당시 숙종이 인현왕후에게 했던 행위를 옥정에게 그대로 반복할 것을 요구한 노론의 종용 아래 아우 장찬과 더불어 절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배소에서 사망했습니다.
사역원 재직 종 2품 동지였던 장경인의 장남으로 희빈장씨, 장희재 남매의 아버지 장형의 사촌형으로 인조 17년 1639년 역과에 장원으로 합격해 한학 교수 등을 거쳐 최고 관직이 종 1품 숭록대부에 이르렀으며 사무처리에 능하고 부지런하여 일찍이 뱃길로 명나라에 다녀왔습니다.
1637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와 효종을 수행해 청나라 심양에서 6년을 모시면서 은밀히 청나라의 사정을 파악하고 청나라의 주요인물들과 인맥을 쌓았으며 심양에서 귀국 후 수역이 된 후 40년간 무려 30여차례 북경에 다녀오며 조선의 대소사를 도맡아 처리했습니다.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 효종, 인평대군과 각별한 친분이 있었으며 특히 효종의 절대적인 신임과 비호를 받았고 1653년 역관들이 무려 50수레가 넘는 인삼을 중국으로 가져가다 발각되자 그간 그를 견제해온 문관들에게 아무런 증거가 없음에도 그 인삼의 주인일 것이라 지목되어 곤욕을 치를 뻔 했지만 효종의 노골적인 비호 아래 처벌에서 벗어났으며 1657년 중인 역관의 신분으로 45세의 젊은 나이에 정 2품 자헌대부에 가자되어 문관에게 공분을 얻었습니다.
효종의 이러한 비호는 북벌을 추구하던 효종의 정책과 역관의 신분을 이용해 청의 첩자와 무기 밀입을 자처하던 장현의 행적에서 그 연유를 파악할수 있는데 청나라의 기밀을 탐지하고 비밀문서를 입수하는 공을 세우고 호란 이후 조선에선 제조가 금지된 화포 등의 무기를 밀입해 들여오는 등 목숨과 사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의지는 효종이 사망후에도 지속되어 숙종 초 청에서 발생한 삼번의 난을 기회삼아 남인의 주도로 다시 일어난 북벌론 때와 종질녀인 옥정이 왕비로 등극한 후 두드러지게 드러납니다.
현종 3년 정 2품 지중추부사로 있었으며 숙종 3년 품직이 종 1품 숭록대부에 이르렀으며 수차례 호국의 공을 세워 마땅히 품계가 올라가야했지만 그때마다 역관과 의관에게 정1품 보국을 가자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는 문관들의 반발로 아들들의 품계를 대신 올려주었고 이후 그의 공이 조카에게까지 넘어갔습니다. 역관의 수장이자 신화였으며 당대의 갑부로서, 숙종 때에는 국중거부라는 별칭이 붙었으며 사돈지간이자 역시 국중거부로 꼽히는 일본어 역관 수장 변승업과 함께 직접무역이 불가한 청나라와 일본 사이의 중계무역을 주도해 조선에 막대한 이득을 안겨주었습니다.
경신환국의 발판인 삼복의 변 직후 4월 17일 , 인평대군의 아들이자 서인의 모략으로 남인 영수 허적의 서자 허견과 함께 대역죄인으로 처형된 복선군 이남과 친밀히 지내왔다는 죄로 도체찰사부 군관이던 조카 장천익과 함께 유배, 이어 5월 7일 그의 아우이자 장천익의 아비인 역관 장찬도 형과 아들이 유배되었는데 홀로 면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김석주의 주장으로 유배, 그러나 유배형을 받은지 얼마 지나지않아 석방되어 사역원으로 복직됩니다. 이에 대한 반발도 거세어 숙종 11년 부터 숙종 12년까지 장현 형제를 역안에서 제거하고 유배해야 한다는 기사만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것만 40건에 이르며 서인의 경계를 받으며 위태로이 활동하던 중 1689년 기사환국이 발발하여 서인 정권이 남인 정권으로 교체되고 숙종의 후궁이었던 종질녀 옥정이 숙종의 계비로 등극함으로 활동을 재개 합니다.
1691년 5월 동생 장찬이 청에서 해외반출을 금지한 일통지를 몰래 사서 조선으로 반입하려다 책문에서 발각, 이에 청에서 조선을 문책하자 장찬에게 모든 책임을 미루어 현 왕비의 당숙임에도 불구하고 70대 노구를 이끌고 금오산성 변경에 충군되는 벌을 받았으며 5월 15일 장현이 조선으로 밀입하려던 화포 25대가 봉황성의 문지기에게 적발되자 장현 역시 모든 책임을 전가받고 벼슬이 2급 강등되는 벌을 받았습니다.
1694년 갑술환국이 발발하여 서인정권으로 교체되자 노론의 총공격을 받아 장희재의 친족이란 죄명으로 1694년 윤5월 13일 유배, 갑술환국 당시, 서인에게 환국 자금을 제공했던 이들이 역관들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그들에게 강한 시기를 받았던 것을 알수 있습니다.
유배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지만 여러 간접 기록으로 미루어 1701년 이전에 유배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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