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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빛소주
하늘빛소주23.08.15

일본이 애니메이션 강국이 될수있었던 이유?

일본은 어떻게 애니메이션 최강국이 될수있었을까요?

정부에서 지원이 있었나요? 아니면 수요계층이 많아서 우리나라와는 다른 어떤것이 있나요.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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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15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탄생 배경은 191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세계대전 특수를 맞이해 경제 부흥을 맞아 해외 문화를 탐닉하던 시대였다. 특히 영화는 대중오락으로 정착되며 영화 스타가 등장하던 시기였고, 닛카쓰, 덴카쓰 등의 영화사들도 설립되던 시기였습니다. 그 와중에 이제 막 제작되기 시작했던 미국 (존 랜덜프 브레이)과 프랑스 (에밀 콜)의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일본에도 소개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 규모는 10조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만큼 투자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니 발전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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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에서는 애니메이션을 한 문화로 보고

    나라에서도 적극적으로 지원을 했습니다

    물론 애니메이션으로 인해 벌어들이는 돈이 상당하기 때문에

    지원해주는 이유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애니 강대국이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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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2차대전 직후에 일본은 미국의 원조를 받으며 다양한 미국의 문화 또한 일본으로 널리 퍼졌는데 그 중 일본인에게 특히 인기있었던 것이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만화문화였습니다. 일본은 이를 자기들만의 문화로 재차 발달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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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이 애니메이션 제작에 있어서 미국과 가장 차별된 점은 바로 리미티드 기법이라고 합니다. 미국은 1초에 24장의 그림을 그려넣어서 붙이는 풀 프레임 방식을 택한 반면 일본은 1초에 10장만 붙여넣는 방식이 바로 리미티드 방식 인데요. 이러한 기법이 바로 제작비 절감에 큰 도움이 되어서 일본에서는 1주일에 30분 짜리 만화 영화를 매주 볼 수 있었던 것 입니다. 이외에도 미국과 차별화된 마케팅 방법이나, 기타 홍보 프로모션 등도 이유가 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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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쌍벽을 이루며 애니메이션 산업을 세계적으로 선도해왔다. 도에이 동화, 무시 프로덕션, 스튜디오 지브리의 활약이 두드러지며, 2000년대 이후에는 작품이 국제화·디지털화되는 추세가 뚜렷하다.


    애니메이션은 유럽, 남미, 호주 등의 영상물 판매 매장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 일본 애니메이션, 기타로 구분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진열 방식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국제적 위상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가리키는 ‘아니메(アニメ)’는 일본 만화를 가리키는 ‘망가(漫画, まんが)’와 더불어 대내적·대외적으로 일본 문화산업의 중추를 이룬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시모카와 오텐(下川凹天), 고우치 준이치(幸內純一), 기타야마 세이타로(北山清太郎)로부터 시작한다.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으나, 서로 정보를 교류하거나 협력한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만화가인 시모카와는 흑판에 분필로 그리는 분필 애니메이션 기법을 시도했으나 시행착오 끝에 단념했다. 이후 배경을 인쇄한 종이에서 캐릭터가 겹치는 부분은 백색 물감으로 지우는 기법을 도입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만든 작품이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으로 알려진 <문지기 이모카와 무쿠조(芋川椋三玄関番の巻)>(1917)이다.


    고우치는 <하나와 헤코나이 명검 이야기(塙凹内名刀之巻)>(1917)로 호평을 받은 이후,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 홍보물인 <인기의 절정에 선 고토 신페이(後藤新平)>(1924)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도쿄 시장이었던 고토 신페이를 선전하기 위한 것으로, 애니메이션의 대중성과 호소력을 일찍이 활용한 작품이다.


    기타야마는 배경과 캐릭터를 종이에 함께 그려 넣는 페이퍼 애니메이션 기법을 사용하여 <원숭이와 게의 전쟁(猿蟹合戦)>(1917)을 만들었다. 1921년에는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 전문 스튜디오인 ‘기타야마 영화 제작소’를 설립했으며, 후에 도에이 동화의 설립에도 관여했다.


    이 세 사람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선구자로서 계몽적·교육적 성격을 띠는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 이들은 산업적 차원이라기보다는 개인적 차원에서 작품을 제작했으며, 대중적 감각이 뛰어났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영화와 애니메이션 업계는 1923년 일어난 관동 대지진으로 인해 스튜디오와 장비에 큰 피해를 입고 한동안 제작이 주춤했다. 이후 무라타 야스지(村田安司)가 <문어의 뼈(蛸の骨)>(1927), <동물 올림픽(動物オリンピック大會)>(1928) 등을 만들며 애니메이션 제작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마사오카 겐조(政岡憲三)는 최초의 본격 토키(talkie) 애니메이션이자 셀 애니메이션인 <힘과 여인의 세상(力と女の世の中)>(1932)을 발표했다.


    세오 미쓰요(瀬尾光世)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소재로 한 <바다 독수리 모모타로(桃太郎の海鷲)>(1942)를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일본 최초의 중·장편 애니메이션으로 길이가 38분에 이른다(그림 1). 속편인 <모모타로·바다의 신병(桃太郎·海の神兵)>(1944)은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1984년에 극적으로 발견되어 뛰어난 예술성을 인정받았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한 이후,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물자난, 식량난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은 뜸해질 수밖에 없었던 반면, 일본에 수입된 미국 상업 애니메이션은 대중의 눈길을 끌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일본 최대의 영화사인 ‘도에이(東映)’가 1955년 ‘도에이 동화(東映動畵)’라는 이름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에 진출하면서 상황은 크게 바뀌게 된다.


    도에이 동화는 ‘동양의 디즈니 스튜디오’라는 기치를 내걸고, 역할 분담이 명확한 분업식 제작 시스템을 갖추었다. 기존의 개인 프로덕션이 기본적으로 작가와 어시스턴트에 의한 가내수공업 형태를 띠었던 데 비해, 분업식 시스템은 제작의 효율성을 높이고 경영 기반을 강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층 진일보한 형태였다.


    도에이 동화는 첫 작품으로 <새끼 고양이의 낙서(こねこのらくがき)>(1957)를 발표한 데 이어, 최초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인 <백사전(白蛇伝)>(1958)를 제작한다. 중국의 전설을 재해석한 <백사전>는 선녹음 후작화, 초당 24컷의 풀 애니메이션(full animation) 방식을 적용하여 작품성에서나 기술력에서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다(그림 2). 뒤이어 <신밧드의 모험(アラビアンナイト·シンドバッドの冒険)>(1962), <개구쟁이 왕자의 왕뱀 퇴치(わんぱく王子の大蛇退治)>(1963)가 대중적 인기를 끌면서,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화의 주춧돌을 놓는 데 기여했다.

    1960년대에 들어 일본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는 동시에 아시아 대륙 최초로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자, 국가적 자신감과 문화적 관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이 1963년 후지 TV에서 방영되기 시작한 <무쇠팔 아톰(鉄腕アトム)>이다(그림 3).


    일본 최초의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물인 <무쇠팔 아톰>은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가 세운 ‘무시 프로덕션(虫プロダクション)’에서 제작했다. 데즈카가 ≪만화소년(漫画少年)≫에 14년간 연재했던 동명의 만화가 원작이다. 당시 도에이 동화가 풀 애니메이션을 고수했던 것과 달리, 무시 프로덕션은 제작비 절감을 위해 초당 프레임 수를 줄인 리미티드 기법을 사용했다. 그 대신 시간의 경과와 움직임을 표현하는 다양한 연출 기법을 개발하는 한편, 로봇 아톰의 활약상을 정교하고 흥미로운 스토리로 풀어내어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의 약점을 극복하려 했다. <무쇠팔 아톰> 시리즈는 이후 나타난 공상과학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에서 경쟁력 있는 제작 모델을 선보인 작품으로 평가를 받는다.


    <무쇠팔 아톰>의 성공에 자극받아 TCJ의 <철인 28호(鉄人28号)>(1963), 도에이 동화의 <늑대소년 켄(狼少年ケン)>(1963) 등 TV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활발히 제작되었다. 1963년에 다섯 편이던 작품 수가 1965년에는 열세 편으로 급증했으며,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TV 콘텐츠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1990년대 후반에 들어 완연한 회복세를 보이던 일본 애니메이션은 미야자키의 <모노노케 히메(もののけ姫)>(1997)가 대성공을 거두며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다. <모노노케 히메>는 무로마치 시대를 배경으로 자연과 인간의 대결과 공생이라는 주제를 다루었으며, 미야자키가 최초로 컴퓨터 그래픽을 부분적으로 사용하여 주목받았다. 이후 미야자키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ハウルの動く城)>(2004), <바람이 분다(風立ちぬ)>(2013) 등의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며 일본 애니메이션의 얼굴로 자리 잡는다.


    다카하타는 1990년대 초반 불황의 침체기에도 <추억은 방울방울(おもひでぽろぽろ)>(1991),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平成狸合戦ぽんぽこ)>(1994)을 연달아 성공시키는 저력을 보였다. 이후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의 4컷 연재만화를 원작으로 한 <이웃집 야마다군(ホーホケキョ となりの山田くん)>(1999)은 스튜디오 지브리 최초의 100% 디지털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5인 가족의 소소한 일상을 담백하게 담아낸 작품으로, 각 에피소드의 끝에 ‘하이쿠(俳句)’를 인용하여 형식적·정서적 마무리를 돕는다(그림 9).

    스튜디오 지브리의 활약과 더불어, 닌텐도의 게임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극장판 포켓몬스터 ― 뮤츠의 역습(劇場版ポケットモンスター·ミュウツーの逆襲)>(1998), <극장판 포켓몬스터 ― 루기아의 탄생(劇場版ポケットモンスター·幻のポケモン ルギア爆誕)>(1999)이 연달아 대성공을 거두면서 아동용 애니메이션의 선전을 이어갔다.


    2000년대 이후 위성방송의 발전, 인터넷의 발달, 국제시장을 겨냥한 마케팅의 흐름을 타고 <메트로폴리스(Metropolis)>(2001),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と千尋の神隠し)>(2001) 등이 해외에서 ‘아니메’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또한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노동 집약적 산업이 기술 집약적 산업으로 전환되는 경향 속에 상업 애니메이션의 1인 제작 시스템이 등장했다. 신카이 마코토(新海誠)는 감독, 각본, 작화 등 작업 대부분을 혼자 진행한 <별의 목소리(ほしのこえ)>(2002)로 주목을 끌었다. 이후 <초속 5센티미터(秒速5センチメートル)>(2007), <언어의 정원(言の葉の庭)>(2013) 등에서 풍경의 아름다움과 인물의 심리를 정밀하게 그려내어 호평을 받았다(그림 10).

    출처 : 세계 애니메이션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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