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이전에 네덜란드, 정성공의 정씨 집권, 그리고 청의 지배를 받아왔습니다. 따라서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해 저항 의식이 약했습니다. 즉 당시 대만은 중국의 한 섬이었으며, 독립적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일본은 대만의 정치적, 군사적 동반자로 여겨졌습니다. 오히려 일본의 대만 지배 과정에서 근대화 인프라 구축으로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게다가 대만은 일본과 같이 섬이며, 문화적으로 친숙하고 교육 및 사회복지에 호의적이었습니다.
청일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전쟁배상금으로 대만을 50년 동안 일본에게 할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아편전쟁으로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 것과 같은 형식이었습니다. 일본은 대여받은 대만을 군국주의와 군사적 거점지로 재탄생시켰고 그 재탄생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사회간접자본을 투입하였습니다. 기간산업의 틀이라고 할 수 있는 터널 교량 도로 등부터 각종 공장과 발전소까지 그렇게 대만을 현대화하는 과정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고 1945년 8월 15일 일제 치하에 있던 모든 식민지가 해방되었듯이 대만도 독립하였으나 때마침 50년 할양이 끝나는 시기였기 때문에 의미는 없었습니다. 국공내전으로 패배한 장개석은 200만 명의 병사를 데리고 대만으로 왔기 때문에 식량문제가 시급했습니다. 때마침 일본은 미처 철수하지 못한 일본군들을 귀순시켜야 했기에 일본과 대만은 외교협상을 진행합니다. 가뜩이나 인구가 많아 식량난에 허덕이던 대만은 조건없이 일본인들을 돌려보냈고 일본은 이에 감복하게 됩니다. 일본 천황은 어떻게서든 보답을 하고자 하여 과거 대만 대부호로부터 들여온 옥으로 만든 병풍을 다시 돌려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