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전을 저술한 허균은 광해군 재위시 도승지로 개혁 정책을 지원합니다. 그러나 그는 1618년 능지처참으로 처형됩니다. 허균이 처형된 이유는 역모죄입니다.
허균은 '호민론', '유재론' 같은 글을 지어 서얼 차별 철폐를 주장하고, 민중 봉기를 경고한 진보적 인물었습니다. 이런 주장은 그가 서자와 불만 계층을 규합해 혁명을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소문이 나순이 나서 이이첨으로부터 의심을 받게되었습니다. 허균은 상소로 역모와 무관함을 밝혔지만 이이첨의 외소년인 세자빈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허균의 딸이 세자의 후궁으로 입궐하면 이이첨의 공격은 더 험해졌습니다.
그리고 1618년 8월 10일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 정아무개 곧 온다"라는 벽서가 붙었습니다. 그리고 8월 16일 허균이 심복 현응민의 소행으로 밝혀지면서 허균이 체포되고 8월 24일 능지처참이 되었습니다. 허균은 당파적 편견과 역모 협의로 처형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