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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호저172
까칠한호저17223.05.29

한석봉은 관료로서의 능력은 뛰어나지 못했나요?

한석봉은 조선 역사상 가장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에 대한 일화도 굉장히 유명합니다만 한석봉이 글씨는 무척이나 잘 썼지만 실제 관료로서의 능력은 굉장히 안좋았다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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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글씨로 얻은 이름값에 비해 벼슬로서는 그리 잘나간 편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글씨만 잘 썼기 때문이다.

    명종 22년(1567년) 진사시만 겨우 합격했다. 현대의 고시에 비유하면 1차 시험에만 합격하고 최종 합격까지는 못한 셈이다. 물론 조선 시대의 과거 문과 시험에 정식으로 합격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으니, 평범한 양반의 입장에서는 이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으며 진사시만 합격해도 양반 신분을 유지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공부에 재능이 없었던 양반들 중에서는 평생 공부의 목표가 진사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합격 후 사자관(寫字官: 공문서의 글씨를 깨끗하게 정리하는 하급 관리)에 머물렀으며 선조가 그 글씨를 아껴 별제라는 관직을 제수했지만 대과에 합격하지 못한 자가 관직에 오르는 것은 부당하다며 참으로 야멸차게 까였다.


    예컨대 사헌부에서 와서별제(瓦署別提) 한호(韓護)는 용심(用心)이 거칠고 비루한 데다 몸가짐이나 일 처리하는 것이 이서(吏胥: 이방)와 같아, 의관(衣冠)을 갖춘 사람들이 그와 동렬(同列)이 되기를 부끄러워하니 체직시키소서.


    라는 상소를 올리는데 대개 자세한 비위 사실이나 능력 부족을 지적하기보다는 인신공격에 머물렀다.


    서예 솜씨만은 명나라에 알려질 정도로 뛰어나 임진왜란 때 중국 관리를 접대하는 데 동원되어 한석봉이 책 하나 필사해 주었다. 그 공로로 왜란 후 선조가 경기도 가평군수로 보냈지만, 글 쓰는 것과 지방 행정은 엄연히 다른 데다 왜란 직후 피폐한 형편까지 겹쳐 가평을 말아먹은 죄로 탄핵되어 강원도 통천현감으로 좌천되었다. 비슷한 예로 김홍도도 그림만 그리다가 연풍 현감을 맡고 대차게 말아먹은 적이 있었다.


    이 때부터 삐딱선을 타서 임진왜란 공신의 교서와 녹권을 개판으로 휘갈기다가 1604년에 파직당한 뒤 이듬해인 1605년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애초에 가평에 보낸 것도 물 맑고 산 좋고 한양에서 가까운 곳에서 글이나 쓰며 지내다 문서 작성할 일 있으면 퀵 타고 달려오라는 것이었는데 가뜩이나 잔읍 상태이던 곳을 말아먹었으니 뭔가 실수 안 하나 살펴보던 사헌부에서 득달같이 몰아친 것. 관료로서는 재능이 영 없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