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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람한스컹크183
우람한스컹크18323.07.23

백제의 마지막 전투인 백강은 어디인가요?

왜가 지원군으로 파병을 온 백제의 실질적 마지막 항전인 백강전투에서 백강지역은 지금의 어느지역이고 대규모 지원병력에도 불구하고 백제가 패배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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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2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강전투는 백제가 멸망한 뒤인 663년에 백제 부흥군과 왜(일본)의 연합군이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맞서 백강에서 벌인 싸움입니다.

    백강 전투에서 이긴 신라는 이후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게 되었습니다.

    백마강(白馬江) 또는 백강(白江)은 충청남도부여군을 지나는 금강의 하류 구간을 부르는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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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강 전투에서 백강은 오늘날의 금강으로 보는 것이 종래의 통설이었으나 근래 동진강이라는 설도 많으며, 아산만 근처로 비정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백제 부흥군은 나당 연합군을 맞아 치열하게 싸웠지만 왜의 함선 대부분이 불에 타는 등의 피해를 입었고 백강 전투의 패배로 백제 부흥운동도 큰 타격을 받고 약화되었으며 이후 지도층의 내분까지 생겨나며 실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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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서기'에서는 백촌강이라고 하고, '삼국사기'에서는 백강구라고 표현되는데 아직 정확히 여기다 하는 것까지 는 연구가 되지 않았습니다. 후보가 금강, 군산포, 동진강, 등입니다. 당나라 수군이 백제로 들어오는 길목 + 일본과의 교통이 가능한곳을 기준으로 해서 이런 후보지들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파병이 됐는데 백제가 요청한 660년 보다 거의 1년 늦은 661년 9월에 됐다고 합니다. 백제를 도와주면 당나라하고 완전 등질 수 있기 때문에 고민하는 시간이 걸렸을 겁니다. 그라고 일본이 당시에는 당나라나 신라보다 선박기술의 발달이 뒤졌고 이 때문에 바다에서의 전술도 덜 발달해서 진걸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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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안경국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제의 마지막 전투인 "백강"은 한반도 서남부 해안에 위치한 백제의 수도인 "마한성"에서 발생한 전투입니다.


    백제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한 고대 국가로, 현대의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일부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백제는 삼한 중 하나로, 삼국 시대인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까지 존재했습니다.


    백강은 기원후 660년에 발생한 전투로, 신라와 통일신라와 함께 삼국 시대의 마지막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신라와 통일신라 연합군이 백제에 대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백제는 이후에 멸망하고, 한반도 남부 지역은 통일신라의 통치하에 통일되었습니다.


    백강은 삼국 시대의 막바지에 발생한 중요한 전투로,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간주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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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60년 전라북도 군산시 금강 하구 유역 일대에서 벌어진 백제와 나당 연합군의 전투

    백제의 국정이 문란해진 틈을 이용 나당 연합군이 탄현(炭峴)을 넘어 공격하여 백제의 장군 계백이 거느린 5,000명의 결사대를 황산벌에서 격파한 뒤,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과 신라의 김인문(金仁問)이 이끄는 13만 명의 당군이 백강(白江)으로 침입하여 백제군과 싸운 전투이다.

    백제는 무왕과 의자왕 대에 걸쳐 신라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고, 이에 위협을 느낀 신라는 김춘추로 하여금 당의 고종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당은 오로지 고구려의 공격에 몰두하고 있었으나, ‘고구려를 멸망시키려면 우선 백제를 쳐부수어야 한다.’라는 전술의 변화에 의해 마침내 백제 공격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당의 고종은 백제 출병을 660년 3월에 명하고, 6월에 출병하기에 이르렀다. 당은 소정방으로 하여금 13만 군병을 통솔하여 정벌하러 오고, 아울러 신라왕 김춘추는 우이도 행군 총관이 되어 신라군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이때 의자왕은 귀양 살이를 하고 있던 좌평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 그 방책을 물었고, 흥수는 5년 전 옥사한 성충이 의자왕에게 올린 글과 같이 백강과 탄현에서 나당 연합군을 저지하자고 주장하였으나 대신들이 흥수가 왕을 원망하고 있다고 말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당과 신라의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계백 장군을 황산벌 전투에 보내고, 이 전투에서 계백 장군이 패한 이후에야 비로소 군사를 합하여 웅진구를 막고 강변에 주둔시켜 지키게 하였다.


    660년 6월 21일 덕물도에 도착한 당군은 신라 태자 김법민과 만나 660년 7월 10일 사비성 남쪽에서 합세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당군은 660년 7월 9일 기벌포에 상륙을 시도하였다. 백강 어귀에 이른 소정방은 기벌포 상륙 작전을 펼쳤는데 1차 상륙 부대는 자신이 거느리고 나머지는 군선을 타고 백강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였다. 소정방 부대는 갯벌에 버들 자리를 깔아 무사히 상륙하였다. 상륙에 성공한 소정방은 산 위에 진을 치고 백제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때 전사한 백제군이 수천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백제군은 당군을 맞아 강가에 둔을 치고 대항하였으나 수적 열세에 밀려 패배하고 수천여 명이 전사한 것이다.

    백강전투의 패배로 인하여 당군은 사비성으로 진격하였고, 백제는 좌평 각가(覺伽)를 시켜 당나라 군대의 철병을 간청하지만 소정방의 거절로 실패하였다. 이에 660년 7월 13일 의자왕은 태자 효와 소수의 측근을 데리고 웅진성으로 피난하였지만, 660년 7월 18일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망하고 백제의 영토는 나당 점령군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백제는 당시 국정의 문제로 인한 내부적 혼란으로 인해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성인 전설과 천방사 전설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당시 백제인들이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노력은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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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제의 마지막 전투인 백강 전투는 663년 8월에 신라의 백강, 현재의 금강 하구 부근에서 벌어진 백제·왜의 연합군과 당·신라의 연합군이 벌인 전투입니다. 당·신라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당시 왜국은 이 상황을 지켜보다 도움을 요청받자 구원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고 당시 이를 주도한 자는 사이메이 덴노와 나카노오오에 황태자로 사이메이 덴노가 후쿠오카에서 준비를 하는 도중 사망하자 나카노오오에 황태자는 즉위식을 미루고 병력부터 파견할 정도로 중시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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