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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람한스컹크183
우람한스컹크18323.08.07

용인전투의 대패는 어떤 점이 원인이었나요?

임진왜란 당시 최악의 전투 중 하나인 용인전투에서 조선군은 5만에서 최대 8만의 병력이 일본군 1600명에 패배를 했는데 어떤 점이 원인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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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07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용인 전투의 대패 원인은 내부 분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용인 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1592년 7월 13일(음력 6월 5일) 경기도 용인에서 이광과 윤선각 등이 이끄는 전라도 이광 4만, 전라도방어사 곽영 2만 + 충청도 윤선각 1만 5천의 약 7~8만 남도근왕군이 겨우 1600명의 일본군에게 크게 패한 전투입니다. '

    장수들은 작전 회의에서 의견이 달라 크게 갈라졌습니다. 광주 목사 권율은 이광에게 사기를 축적하면서 조정의 명을 들어야 한다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수원의 독성산성으로 먼저 가서 진을 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광은 군율을 어기고 권율의 계책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광은 선봉장 이지시와 전라도 방어사 곽영, 방어사 백광언의 1000명의 군사들과 합세해 7월 13일(음력 6월 5일) 왜군을 공격했습니다. 권율이 다시 신중하게 전투를 치르라고 경고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백광언은 적이 적은 것을 보고 먼저 갔다가 선봉장 이지시, 이지시의 동생 이지례와 함께 왜군의 탄환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맹장이었던 백광언과 이지시가 죽자 사기가 크게 떨어졌습니다. 다음날인 7월 14일(음력 6월 6일) 군사들이 밥을 지어 먹으려고 할 때 왜군이 산골짜기를 따라 기습하여 크게 패해 이광과 김수, 곽영은 도망쳤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용인전투의 근원적인 이유는

    느슨한 군기 이완 문제가 가장 컸으며, 무엇보다도 급박하게 1차 근왕군을

    조직하면서 발생한 문제, 즉 군수

    지원이나 너무 빠른 행군 등으로 인한

    병력의 피로 문제가 겹쳤고,

    2차 근왕군 조직 당시 옥과와 순창의

    향병들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킨 것도 원인이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지휘 체계가 일원화 되지 않은 것으로 전라도 군은 이광과 곽영으로 이원화 되어있었고 직책상 이광보다 위에 있던 김수는 병력이 단 100명에 불과, 그들이 수원의 독산산성에 진을 쳤을 때 왜군 1000여 명이 용인쪽으로 이동했는데 이 첩보를 접한 근왕군 내부에서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광주 목사 권율은 한양 탈환을 앞둔 상황에서 작은 규모의 적과 교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했으며 반면 이광은 눈앞에 적을 두고 그냥 갈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또 지휘관을 문관으로 세운 것으로, 문관은 전투를 수행함에 소극적일수 밖에 없는데 무관들은 이들을 겁쟁이라고 업신여겼고, 이광이 군사 8000명을 이끌고 한양을 향해 올라가던 중 한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데 이때 이광은 후퇴하려하자 조방광 백광언이 반발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사들의 사기가 저하되어 있어서 통제를 벗어나 무질서하게 행동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