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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람찬타킨23622.03.12

로스차일드 가문이 어떤 덴가요?

로스차일드는 가문이 나폴레옹의 워털루 전쟁때 런던주식을 쓸어담았다고 하는데 어떤 일이 있었나요?

그 가문은 어떻게 부자가 되었나요? 프랑스의 유명한 와인 무통 로쉴드도 같은 가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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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양균 경제·금융전문가입니다.

    유대계 금융 재벌인 로스차일드 가문의 금기가 깨졌습니다. 로스차일드 성을 쓰는 남성만 오를 수 있었던 은행 최고경영자 자리에 처음으로 다른 성을 가진 사람이 임명된 거죠. 주인공은 바로 니겔 히긴스(49). 로스차일드 가문은 바로 이 고리타분한 원칙으로, 지난 200년 동안 세계 금융을 좌지우지하는 황금 권력으로 군림해 왔습니다. 영국 귀족인 모세 몬피티리오란 외척이 로스차일드로 성을 바꿔 경영에 참여했을 정도였습니다. 오늘은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죠. / 김경진 기자 - See more at: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023538#sthash.ZBENETxr.dpuf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한 기사 하나입니다. 그 가문의 발전 과정에 대하여 간단한 요약이 있습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유대인 마이어, 제후국의 재정 대리인 돼 가문 일으켜
    시작은 미약했습니다. 가문을 일으킨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1744년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게토(격리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성이 없었습니다.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은 집 대문에 그려진 ‘붉은(rot) 방패(schild)’에서 따온 것이죠. 아버지를 일찍 여읜 11살의 소년은 하노버의 한 은행에서 사환으로 일하게 됩니다. 소년은 여기서 안주하지 않고 5년 뒤 고향으로 돌아와 골동품 가게를 시작합니다. 그러다 주화 수집광인 당시 수석 재정관 부데루스를 통해 헤센의 제후인 빌헬름 공과 친분을 쌓게 됩니다. 진귀한 주화를 빌헬름 공에게 갖다 바치며 공을 들인 결과, 그는 1769년 어용 상인으로 지정됩니다. 그는 특유의 인내심으로 때를 기다립니다. 친영국 성향의 빌헬름 공이 나폴레옹 군대에 쫓겨 망명을 떠나자 목숨을 걸고 그의 대외 차관 장부를 지켜냅니다. 자신의 재산을 다 뺏기면서까지 말이죠. 대가는 컸습니다. 돌아온 빌헬름 공은 그에게 유럽 각국에서 돈을 수금할 수 있는 권리를 줍니다. 두둑한 커미션과 함께 말이죠. 가난한 유대인 골동품상이 왕실 재정 대리인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는 다섯 아들에게 자신을 대리해 유럽 각국에서 수금하는 일을 맡깁니다. 덕분에 그의 아들들은 유럽의 지리와 정보를 훤히 꿰뚫게 됐습니다. 이 일은 머지않아 로스차일드 가문이 다국적 금융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됩니다.

    유럽에 포진한 다섯 아들, 정보 교환하며 돈줄 쥐어 마 이어의 가장 큰 무기는 그의 아들들이었습니다. 마이어는 1798년 당시 21세였던 셋째 네이선을 영국으로 보냅니다. 네이선의 진두지휘 아래 워털루 전투에서 엄청난 자본을 증식시킨 형제는 유럽 주요 도시에 은행을 하나씩 세워 나갑니다. 첫째인 암셀은 프랑크프루트, 둘째인 살로몬은 빈, 셋째 네이선은 런던, 넷째 칼은 나폴리, 다섯째 제임스는 파리에 은행을 세웁니다. 역사상 최초의 다국적 금융 기업이 탄생한 거죠.

    가문의 사신들은 이 다섯 은행을 오가며 정부와 금융계의 동향을 다른 국가의 은행에 30시간 정도 먼저 알렸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먼저 안 형제들은 각국에서 공매도를 합니다. 주식 가격이 떨어질 것을 미리 알고 주식이 없는 상태에서 주식을 판 다음 가격이 떨어진 이후 싼 주식을 사서 메우는 투자 방식이죠. 이런 식으로 다섯 형제는 한 몸처럼 움직였고 그 결과 유럽의 돈줄을 움켜쥘 수 있었습니다.

    형 제 중 하나가 손해를 봐도 다른 형제가 이를 만회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 철도 사업에서 재미를 못 보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철도 건설을 추진하는 식이었지요. 프랑스에서 민간은행 때문에 손해를 봤을 땐 오스트리아에 그와 똑같은 민간 은행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가문의 문장에는 5개의 화살이 리본에 묶여 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이 다섯 개의 화살이 바로 이들 5형제를 뜻합니다. 화살처럼 빠르되, 하나로 묶여 있어 어느 누구도 부러뜨릴 수 없는 강한 힘을 지닌 형제 말이죠.

    횡령금으로 밀수…잘못된 정보 흘려 수익 올리기도
    형 제 중 가장 두뇌가 비상했던 사람은 셋째인 네이선이었습니다. 그는 겨우 2만 파운드를 들고 영국으로 건너가 의류 수출 사업으로 돈을 벌었습니다. 1806년 나폴레옹이 영국에 대륙 봉쇄령을 내리자 유럽의 공산품 가격은 폭등했습니다. 싸고 품질 좋은 영국산 제품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이때 네이선은 빌헬름 공의 투자자금을 횡령해 밀수 사업에 뛰어들어 돈방석에 앉게 됩니다. 네이선은 이 돈의 절반을 황금에 투자했고 전쟁으로 황금 값이 치솟자 정부에 비싼 값에 팔아 넘기며 차익을 남깁니다. 여기에 적진을 뚫고 황금을 영국군에게 전달하고 수수료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죠.

    이후 네이선은 영국 로스차일드 은행을 세우고 본격적인 금융 사업에 뛰어듭니다. 그러던 1815년 6월 18일 토요일. 가문의 운명을 바꿔놓은 사건이 터집니다. 이날은 벨기에 남동부의 워털루 전쟁에서 영국군이 승리한 날입니다. 이 소식을 영국에서 가장 빨리 접한 사람은 네이선이었습니다. 그는 가지고 있던 영국 국채를 모두 내다 팝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영국이 전쟁에서 패한 것으로 생각해 정신없이 영국 국채를 팔아치웁니다. 국채 가격이 55% 이하로 떨어지자 네이선은 유유히 국채를 다시 사들입니다. 이날 100파운드에 달하던 영국 국채는 한때 5파운드까지 떨어졌습니다. 네이선이 헐값에 영국 국채를 사들인 후에야 영국군의 승전보가 울렸습니다. 그는 폭등하는 영국 국채를 되팔아 엄청난 차익을 남기게 됩니다. 막내인 제임스 역시 프랑스에서 같은 방식으로 돈을 법니다. 워털루 전투 후 형제의 재산은 2억3000만 파운드로 불어나게 됩니다.

    편지 조작하면서까지 전쟁 막아 재산 지켜 네이선은 훗날 이렇게 회상합니다. “거리가 피로 물들 때마다 나는 사들였다.” 가문의 재산이 증식된 순간이 모두 전쟁과 연관돼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나폴레옹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로스차일드 가문도 없었을 겁니다. 오죽하면 다섯 아들의 어머니인 구틀은 “내 아들이 전쟁을 원치 않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을까요. 아들들이 돈줄을 막아버리면 전쟁을 하고 싶어도 못한다는 얘기죠.

    그러나 부가 어느 정도 쌓이면 이를 지키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라지요. 로스차일드 가문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국채의 가격 하락을 막기 위해서라도 평화를 원했습니다. 7월혁명 이후 프랑스의 루이 필리프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재상 사이에 갈등이 불거지며 전쟁 기운이 감돌자 다섯째인 제임스는 조작된 편지를 보내 둘을 화해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부와 외교력을 바탕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은 국가의 굵직굵직한 사업에 참여함으로써 자본을 증식해 나갑니다. 네이선의 아들인 라이오넬은 1875년 어마어마한 거래를 아무렇지 않게 성사시킵니다. 수에즈 운하의 주식 지분을 가진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의 주식을 판다는 소식을 들은 라이오넬은 디즈레일리 영국 총리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총리는 라이오넬에게 400만 파운드를 빌려 주식을 사들입니다. 이 거래를 통해 라이오넬은 10만 파운드의 수수료를 챙기게 됩니다. 동시에 영국 정부에 막대한 이익을 선사합니다. 1935년 이 주식의 가치는 9500만 파운드로 늘어납니다. 그와 비례해 로스차일드 은행의 명성도 나날이 높아진 건 당연하겠죠.

    1885년 영국서 상원의원에 임명, 첫 유대인 세습귀족
    3 대가 되자 가문의 후손들은 부와 함께 명예도 누렸습니다. 1885년 라이오넬의 장남 너대니얼(내티)은 영국 여왕으로부터 상원의원에 임명됐습니다. 이로써 역사상 첫 유대인 세습 귀족이 탄생합니다. (내티는 신중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1911년 타이타닉호가 건조될 당시 금융계는 ‘영원히 가라앉지 않을 것 같은 배’인 타이타닉의 보험 사업에 진출하려 혈안이 돼 있었습니다. 타이타닉이 가라앉자 보험회사들은 줄줄이 도산했습니다. 로스차일드 은행만 무사했습니다. 내티가 보험 사업에 아예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이죠. 사람들이 내티에게 비결을 묻자 당시 내티는 “그렇게 큰 배가 도저히 뜰 것 같지 않았다”고 시큰둥하게 대답합니다. 그러나 사실 내티는 타이타닉이 건조될 때 이미 뛰어난 정보력으로 위험성을 간파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제임스로부터 이어지는 프랑스 로스차일드 가문의 명성도 대단했습니다. 1871년 ‘베르사유 강화조약’을 체결할 당시 프랑스의 알퐁스는 전쟁배상금을 낮추는 협상을 돕고, 50억 프랑을 프랑스 정부에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1880 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럽 최대의 미술품 수집가가 됩니다. 라이오넬은 렘브란트 등 17세기 네덜란드 유화 수집광이었습니다. 제임스의 막내 아들인 에드먼드는 판화 수집에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현재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는 에드먼드가 기증한 판화를 전시한 ‘에드먼드 로스차일드 홀’이 있습니다. 에드먼드는 기부의 스케일도 달랐습니다. 그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이 거주할 수 있는 땅을 사 유대인을 이주시켜 이스라엘을 세우는 데 기여했습니다. 내티의 손자인 빅터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쟁터에서 폭탄 해체 전문가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 능력을 인정받아 처칠 총리의 신변 보호 임무를 맡기도 했지요.

    20세기 들어 위축…82년 투자은행 세워 재도약 하지만 철옹성 같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부와 명성도 시들기 시작했습니다. 1863년, 나폴리 은행이 시칠리아 황실의 몰락과 함께 사라진 데 이어 후계자가 없던 프랑크푸르트 은행도 1901년 문을 닫습니다. 빈 은행은 1938년 나치에 몰수됐습니다.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치는 과정에서도 많은 재산을 잃습니다. 전후엔 정부의 과세 공격에 시달렸습니다. 특히 로스차일드 은행의 양대 축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은행은 1981년 사회당이 집권하면서 국유화됐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겐 200년을 이어온 번영의 무기가 있었습니다. 가문의 문장에 새겨진 ‘콩코디아(협력)’였습니다. 프랑스의 로스차일드 가문은 오를레앙을 설립했고 영국 일가와 지분 관계를 맺은 뒤 전 세계로 뻗어나갔습니다. 프랑스와 영국 일가는 1982년 40년 전 미국 뉴욕에 세웠던 뉴코트 증권을 확장해 로스차일드 투자은행을 설립합니다. 하지만 너무 늦게 진출해서일까요. 금융 재벌로서 로스차일드의 명성은 시들해집니다. 하지만 은행 사업은 이들 가문의 거대한 부의 일부일 뿐이었습니다.

    다이아몬드, 와인, 생물 이름까지 뻗어간 ‘명성’로 스차일드 가문의 영향력은 우리가 잘 모르는 영역까지 뻗어있습니다. 프랑스 로스차일드 은행은 1956년 PLM이라는 최고급 호텔 체인을 설립합니다. 1967년에는 북방 회사를 설립해 광산업에 뛰어듭니다. 프랑스·영국 로스차일드가는 장기적으로 광산업에 투자해 왔습니다. 이 때문에 2005년 광산물 가격이 폭등했을 때 엄청난 이익을 챙깁니다. 로스차일드가가 폭등을 주도했다는 음모론이 나오기도 했지요. 로스차일드 가문은 현재 리오틴토를 포함한 세계 3대 광산업체와 다이아몬드를 생산하는 남아프리카 드 비어스 그룹의 지분도 갖고 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내티의 장남인 월터는 생물학자였습니다. 그 덕분에 지구상에는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을 가진 생물이 200종이 넘습니다. 프랑스 보르도 와인 중 세계 최상품을 자랑하는 라피트와 무통이 바로 로스차일드 가문 소유의 와이너리에서 생산되고 있습니다. 이 와인의 라벨에선 지금도 가문의 표식인 다섯 개의 화살을 발견하실 수 있답니다. 그럼에도 로스차일드가의 재산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 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전 세계 1년 총생산(GDP)과 맞먹는다는 소문도 있고, 석유 부호 록펠러 가문을 능가한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상장을 하지 않고 오직 직계 가족을 통해서만 재산과 정보가 이동하기 때문에 모든 게 추정일 뿐입니다. 니겔 히긴스 신임 CEO의 등장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의 베일이 벗겨질 수 있을지에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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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월 유대계 금융 재벌인 로스차일드 가문의 금기가 깨졌습니다. 로스차일드 성을 쓰는 남성만 오를 수 있었던 은행 최고경영자 자리에 처음으로 다른 성을 가진 사람이 임명된 거죠. 주인공은 바로 니겔 히긴스(49). 로스차일드 가문은 바로 이 고리타분한 원칙으로, 지난 200년 동안 세계 금융을 좌지우지하는 황금 권력으로 군림해 왔습니다. 영국 귀족인 모세 몬피티리오란 외척이 로스차일드로 성을 바꿔 경영에 참여했을 정도였습니다. 오늘은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죠. / 김경진 기자 - See more at: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023538#sthash.ZBENETxr.dpuf

    18세기 이후 약 250년간 '유럽과 전세계의 돈'을 장악해 왔던 로스차일드가.
    나폴레옹전쟁,워털루전쟁,미국 남북전쟁,러일전쟁,제1차 세계대전,제2차 세계대전,모든 전쟁을 비롯해 수에즈운하 건설,산업혁명, 각국 중앙은행 설립에 이르기까지 로스차일드가는 인류 역사의 주요 사건과 전쟁에 개입해 왔습니다.

    전쟁시 양쪽 정부에 모두 돈을 빌려주어 더 많은 돈을 버는 수법으로 유명했던 그들에 대해 당시 유럽에서는 '로스차일드가의 지원이 없으면 유럽의 어떤 왕도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는 말이 떠돌았고, 이미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있던
    나탄 로스차일드는 자신이 전쟁과 평화의 중재자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M.A. 로스차일드의 부인이자 그의 다섯 아들의 어머니였던 '구틀 슈내퍼'는 세상을 뜨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들이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면, 전쟁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도 없어질 것이다.'

    각국 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멪으며 전쟁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은 그들은 유럽 국가들의 재정까지 마음대로 움직했으며, 막대한 부를 통해 유럽 경제를 움켜쥔 후에는 미국에도 손을 뻗치기 시작합니다.'야콥 시프'라는 청년을 로스차일드가의 대리인으로 보내어 미국경제도 모두 자신들이 장악합니다.

    미 국의 대표적인 은행가 JP모건, 절강의 카네기, 철도의 해리먼, 석유의 록펠러 등은 모두 로스차일드의 자금을 받아서 사업을 하고 거부가 된 사람들입니다.뿐만 아니라 1913년 미국 연방준비은행(FRB)을 설립하도록 함으로써 미국의 화폐발행권까지 손에 넣게 되며,그 결과 막대한 이자를 벌어들이게 됩니다.

    그들은 유럽국가들의 식민지정책에도 돈을 지원하여. 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광산,석탄 및 각종 지하자원등을 개발하여 부를 축적했고 1917년 러시아의 공산혁명에도 돈을 대 마지막 남은 유럽의 독립 왕조까지 결국 무너뜨립니다.

    또 한 영국정부의 수에즈운하 주식 매입자금을 공급하여 식민지 기반을 조성하고, 당시 오일로드 확보를 위해 영국이 점령했던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벨푸어 선언’ 즉.영국이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인에게 양도하여 유대국가를 건설하도록 한 약속을 통해서 향후 이스라엘 독립의 단초를 제공하도록 합니다.

    실제 이스라엘 건국시에 로스차일드가에서는 막대한 자금을 건국자금으로 지원하기도 하였으며,현재까지도 많은 돈을 대고 있고 정보조직 '모사드'를 개인조직처럼 활용하고 있기도 합니다.물론 이스라엘의 독립은 세계정부 수립과정 에서 미리 계획된 '치명적인 분쟁'을 위한 필요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역사

    현재의 로스차일드 가를 만든 장본인은 메이어 암셸 바우어(Mayer Amschel Bauer)입니다. 그는 1744년에 독일 프랑크 푸르트의 유대인 거주지역인 게토
    에서 태어났습니다. 골동품업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가게 앞에 붉은 방패(rot schild 독일어로 로트쉴트, rot 붉은색, schild 방패)를 내걸었습니다.

    후에 메이어 암셸 바우어는 자신의 성씨를 아버지 골동품 가게의 이름을 따서 로스차일드(Rothschild)라고 바꾸게 됩니다. 메이어는 어린 시절부터 두뇌가
    명석하였으며 아버지에 의해 여러 교육을 받게 됩니다. 특히 상업적인 부분에 대해서 많은 교육을 받고 실제 아버지를 도와 가게에서 일하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몇년 후 사망하자 마이어는 13살의 나이에 오펜하이머 가문 은행에 견습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얼마지 않아 정식 직원이 된 그는 당시의 새로운
    금융 시스템에 눈을 뜨게 됩니다. 20세가 되어 프랑크 푸르트로 돌아온 그는 아버지처럼 옛날 화폐를 취급하는 골동품점과 대부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희귀 금화등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들 '빌헬름 황태자'에게 금화등을 싸게 공급하며 인연을 맺게 되고,1769년에는 왕실의 정식 대리인인 어용상인이 됩니다.

    또한 화폐 수집상뿐만 아니라 환전상도 겸했던 메이어는 빌헬름의 런던에서 보내오는 환어음을 현금화하는 사업을 시작하였으며,당시 왕실의 재정과 함께 국제적인 자금조달,그리고 비밀자금 관리에도 깊이 개입하고 있었습니다.

    황태자가 빌헬름 9세로 즉위한지 얼마되지 않아, 나폴레옹이 독일을 침공하자 빌헬름 왕은 덴마크로 망명하면서 메이어에게 300만 달러의 돈을 맡기게 되고
    메이어 암셸 로스차일드는 이 돈을 다섯 아들에게 주어 유럽의 주요 국가들에 파견, 나눠준 사업자금을 발판으로 시장을 개척하며 사업을 하도록 했습니다.



    암셸 로스차일드 Amschel Mayer Rothschild (1773–1855): Frankfurt
    살로몬 로스차일드 Salomon Mayer Rothschild (1774–1855): Vienna
    나탄 로스차일드 Nathan Mayer Rothschild (1777–1836): London
    카를 로스차일드 Calmann Mayer Rothschild (1788–1855): Naples
    야곱 로스차일드 Jakob Mayer Rothschild (1792–1868): Paris

    메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습니다. 빌헬름 왕의 자금을 받은 그는 장남 암셸을 프랑크 푸르트에 남게 하고, 살로몬을 오스트리아 빈에 삼남 나탄(네이선)을 영국 런던,카를을 이탈리아 나폴리,야곱(제임스)를 프랑스로 보내게 됩니다.

    그의 다섯 아들들은 유럽의 전역에 은행을 설립하고, 협력하며 유럽의 금융기관으로 성장해 나갔습니다. 그들은 통신과 마차들을 비롯해 각종 수송수단들을 이용하여 나라간 '정보 네트웍'을 만든 다음 사업에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1806년 나폴레옹이 영국에 대륙 봉쇄령을 내리자 유럽의 공산품 가격은 폭등했는데, 값싸고 품질이 좋은 영국 상품을 살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영국으로
    진출한 나탄(네이선)은 프랑스에 있는 동생 야콥(제임스)와 손잡고 밀수형태로 영국 상품을 유럽에 파는 사업을 통해서 많은 돈을 벌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로 진격하려던 영국 웰링턴 장군의 군대가 군비부족으로 곤경을 처하게 된 것을 알고는,빌헬름 왕이 맡긴 돈 300만 달러와 자신이 영국과의 밀수로 벌어들인 돈을 합해서 동인도 회사의 금을 사들입니다. 금값은 치솟았고 결국 영국 정부는 어쩔수 없이 비싼 가격에 황금을 매입하게 됩니다.

    나탄(네이선)은 거기에다 자신이 판 금의 수송까지 제안하며 수수료를 챙기게 됩니다. 동생 제임스를 통해 프랑스 정부에 공식 통지하게 한후,프랑스군이 봉쇄하고 있던 길로 금을 운송하고 금화로 환전했습니다.그리고 로스차일드가의 운반 통로를 통해 스페인의 영국군 월링턴 장군에게로 전달했습니다.

    이후 나탄(네이선)은 영국 로스차일드 은행을 세우고 금융사업에 뛰어들게 됩니다. 1815년 6월 벨기에 워털루에서 벌인 전투에서 영국군이, 엘바섬에서 돌아온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게 승리한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그는.. 곧바로 주식거래소로 향합니다. 그리고 영국 채권을 통해 큰 재산을 벌어들입니다.

    이미 그의 정보력과 재력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그의 움직임을 주의깊게 보게 됩니다.전쟁에서 지면 국채가격이 폭락하기 때문입니다. 나탄(네이선)은 거래소로 가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영국 국채를 모두 팔아 치웁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영국이 전쟁에서 패한 줄'로 알고 정신없이 국채를 팔기 시작합니다.

    시장은 일시에 패닉 상태에 빠지고 영국 국채는 헐값이 됩니다.이틈을 노려서 나탄(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싼 값에 국채를 모두 다시 사들이고, 영국의 승전보가 전해진 후에 폭등한 영국 국채를 되팔아 엄청난 차익을 얻게 됩니다.

    막내인 제임스 로스차일드 역시 비슷한 형태로 '프랑스 국채'를 사들여서 폭락시키고 되사는 방법으로, 자신의 지위상승은 물론 재산도 함께 불리게 됩니다.
    이후 이들 형제들은 왕실과의 관계,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이권사업을 통해서 재산을 증식해 갔으며 유럽에서 그들의 경제 장악력도 커져갔습니다.

    전쟁을 통해서 양쪽에 돈을 빌려주어 부를 축척한 그들은 그러한 수법을 계속 되풀이하며, 세계를 뒤흔든 거의 모든 전쟁에 개입하여 재산을 늘려 갔습니다.또한 화폐발행과 중앙은행 설립을 통해서 국민의 세금으로 천문학적인 이자를 벌어들이며, 각 국가를 그들의 '영원한' 채무국 상태로 몰아갔습니다.

    로스차일드와 조지 소로스

    거기에 인위적인 경제위기와 세계 대공황등을 일으켜 앞서 영국의 '국채매입'과 비슷한 형태로 헐값이 된 기업과 자산을 인수하고 주식,채권등을 매입하므로써 자신들의 부를 축척해 나갔습니다. IMF나 세계은행처럼 브랜트우즈 협정에 의해 만들어진 기관의 고금리 대출과 이들의 역할 또한 물론 중요했습니다.
    1997년 하반기 아시아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때에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수상은 아시아 경제위기의 주역으로 '조지 소로스'를 꼽았습니다. 금융파생상품 헤지펀드 등을 앞세워 세계 금융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그는 태국 바트화를 폭락 시켜 당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금융위기를 일으킨 장본인 입니다.

    아시아 각국의 통화가치가 급격히 떨어져 환율이 급등하고,외국 자본 유출이 한꺼번에 일어나면서 한국은 당시 결국 IMF의 구제금융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특히 소로스는 이 방면으로 아주 유명합니다.
    1992년 그의 퀸덤 펀드는 영국 파운드화에 대대적인 매도를 하며 런던 외환시장을 공격했습니다. 파운드화는 폭락했고,소로스는 10억달러를 벌었습니다.

    1993 년에는 프랑스 프랑화, 벨기에 프랑스화, 덴마크 크로네화 등 유럽 전역의 중앙은행들을 상대로 환투기 공세를 전개해서 독일 마르크화에 대해 폭락하게함으로써 2차 유럽통화 위기를 발발시켰습니다. 전년에 영국은행으로부터 벌어들인 액수보다 더 많은 11억 달러를 벌어드리게 됩니다.

    1995년엔 일본은행과 엔화를 공격해 일본정부에 엄청난 환손실을 입게하고는 '일본정부의 금리인하'라는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도 했습니다.일본에서는 당시 '요카이','검은 유대 마피아'란 별명이 붙었고 영국에서는 '파운드화를 망가뜨린 악마의 손', '갱'이라는 원색적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로스의 배후에 '로스차일드 가문'이 있습니다.그는 나폴레옹 전쟁이후로 줄곧 사용되어 온 시장조작 전략(?)을 실행하는 대리인에 불과합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

    현재 로스차일드가의 재산은 베일 속에 감춰져 있으며 제대로 된 접근 자체도 불가능합니다. 미국 FRB(연방준비은행)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중앙은행들은
    그들의 소유이고, 국채나 화폐발행으로 인한 이자 수입은 천문학적입니다.

    그외에도 로스차일드 가문은 금융업을 기본으로 석유, 다이아몬드, 금, 우라늄, 레저산업, 백화점 등의 분야에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런던의 로스차일드 은행은 잉글랜드 은행의 대리점으로서 '국제 금가격'을 결정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최고급 포도주 가운데 하나인 보르도의 샤토 무통, 샤토 라피트 등을 생산하는 포도원도 이 가문이 소유하고 있으며, 이 와인의 라벨에선 지금도 가문의 표식인 다섯 개의 화살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2007년 3월 8일 뉴욕타임스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차기 후계자로 영국 지부의 4대 후계자인 제이콥 로스차일드의 아들 '나탄(너대니얼) 로스차일드' 회장이
    떠올랐다고 보도했습니다. 헤지펀드 운영업체인 아티커스캐피털 공동 회장인 그는 과거 어느 후계자보다도 많은 부를 소유할것이라고 신문은 전망했습니다

    로스차일드라는 가문이 빌게이츠나 워렌버핏,'포브스의 100대부자' 리스트에있는 CEO들에 비해, 일반인들에게 덜 알려지고 생소한 느낌을 주고 있다거나
    마치 비중없거나 쇠락한 가문처럼 비춰지고 있는 것은 철저한 전략입니다.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뉴 월드 오더’.. 주요 국가 대통령들이 TV 인터뷰에서 입만 열면 말하는 신세계질서와 세계 정부수립을 위해서 유럽 각국의 왕실과
    각 나라 대통령과 정치인, 로스차일드와 록펠러를 비롯한 국제 금융세력들은 매스컴을 차단한 채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한 비밀화의를 합니다.

    매년 1년에 한번씩 절대로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하고 참석하는 '빌더버그 회의'를 통해 향후 세계지배 전략과 세계 단일국가 수립을 위한 계획을 논의합니다.그 외에 삼각위원회,CFR 등을 각종 기구와 UN을 비롯한 IMF,세계은행등 세계정부수립 단체들의 맨 위에 로스차일드가가 있습니다.

    미국 CFR이 16년간 연구하여 나온 '세계통합전략'에서 그들은 세계를 10개로 구분하여 각 분야별로 책임 국가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교육질서'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 교육을 과도하게 칭찬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또한 빌더버그 그룹 회원이며 프리메이슨입니다.

    유대인 마이어, 제후국의 재정 대리인 돼 가문 일으켜
    시 작은 미약했습니다. 가문을 일으킨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1744년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게토(격리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성이 없었습니다.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은 집 대문에 그려진 ‘붉은(rot) 방패(schild)’에서 따온 것이죠. 아버지를 일찍 여읜 11살의 소년은 하노버의 한 은행에서 사환으로 일하게 됩니다. 소년은 여기서 안주하지 않고 5년 뒤 고향으로 돌아와 골동품 가게를 시작합니다. 그러다 주화 수집광인 당시 수석 재정관 부데루스를 통해 헤센의 제후인 빌헬름 공과 친분을 쌓게 됩니다. 진귀한 주화를 빌헬름 공에게 갖다 바치며 공을 들인 결과, 그는 1769년 어용 상인으로 지정됩니다. 그는 특유의 인내심으로 때를 기다립니다. 친영국 성향의 빌헬름 공이 나폴레옹 군대에 쫓겨 망명을 떠나자 목숨을 걸고 그의 대외 차관 장부를 지켜냅니다. 자신의 재산을 다 뺏기면서까지 말이죠. 대가는 컸습니다. 돌아온 빌헬름 공은 그에게 유럽 각국에서 돈을 수금할 수 있는 권리를 줍니다. 두둑한 커미션과 함께 말이죠. 가난한 유대인 골동품상이 왕실 재정 대리인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습니다. - See more at: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023538#sthash.ZBENETxr.dpu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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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스차일드(Rothschilds) 가문은 조상 대대로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지역 게토에서 고물상을 하면서, 붉은 방패(독일어로 로트칠트)를 집 앞에 내 걸었다. 국제적 금융기업을 보유하고 있는 유대계 금융재벌 가문이다. 로스차일드는 독일어 로트실트(Rothschild)의 영어식 발음으로 프랑스어로는 로쉴드라고 읽는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주요 국가들의 공채 발행과 왕가·귀족들의 자산 관리를 맡아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철도와 석유산업의 발달을 주도하며 유럽의 정치와 경제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소규모로 환전상을 하던 마이어 암셸 로트실트는 헤센 선제후국의 통치자인 빌헬름 9세의 신임을 얻으면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1789년 빌헬름 9세에게 정식으로 대부업을 승인받은 로스차일드 가는 1792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전쟁과 1803년에 시작된 나폴레옹 전쟁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구축한 정보망과 유통망을 배경으로 나폴레옹의 베를린칙령 이후 가격이 폭등한 영국의 면제품 등을 몰래 들여와 팔면서 큰 이익을 얻었다. 그리고 런던과 파리에 엔엠로스차일드앤선즈(N. M. Rothschild & Sons) 은행과 로쉴드 은행(Banque Rothschild)을 각각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금융업으로 진출해 상업어음의 발행과 대부업으로 큰 수익을 거두었다. 나폴레옹 전쟁 때에는 영국 정부를 도와 동맹국들에 보내는 자금 운송과 대부 사업 등을 벌였으며, 영국 전시공채를 대량으로 매입해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한 뒤 큰 차익을 남기기도 했다. 프랑스에 다시 왕정이 들어선 뒤에는 국내로 돌아온 귀족들의 재산 관리를 맡아 투자 사업을 벌이며 부를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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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한때 금값을 정하는게 로스차일드 가문이라고 했을정도로 돈이 많고 경제권을 장악하고있습니다

    로스차일드가문이 소유한 은행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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