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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한테리어2
세심한테리어223.11.01

반란은 없을것같던 북한에도 옛날에 처음이자 마지막 반란이 한번 잇엇다고합니다.

과거 소련에 잇던 시기라는데 프룬제군사대학쿠데타사건이라고 명칭되어잇더라구요. 거의 성공할뻔햇다고 하는데 쿠데타과정이나 상세한내용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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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92년 북한에서 벌어진 프룬제 군사대학 출신 유학생들의 쿠데타 모의 사건입니다.

    과거 냉전 시절 북한은 공산권의 지도국가 구 소련에 수많은 유학생을 파견, 이들은 대체로 북한에서도 상위계층 출신이었고 김일성의 관심도 남달라 거액의 장학금을 받는 등 많은 지원을 받았습니다. 한편 구 소련도 북한에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 북한 유학생들을 상당히 우대, 이 중 일부는 KGB가 연일 백인 미녀들과 술을 대 주면서 자신들의 정보원을 포섭했다고 합니다. 당시 북한의 소련 유학생들은 이런 양쪽의 지원에 힘입어 상당히 여유로운 생활을 했고, 수완이 좋은 일부는 장사에도 손을 대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KGB에 포섭된 소련 유학생들은 현지 정보기관과 결탁해 북한 내부 정부를 유출, 소련은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생기면 이들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킬 계획을 갖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소련은 단계별로 돈을 지불했고 이를 거부하면 낙제생으로 만들고 테러 조직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씌워 재판장에 세웠습니다.

    한편 소련에서 유복한 삶을 살던 엘리트 유학파 장교들은 북한에 돌아와 매우 열악한 처우를 받게 되고, 이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 이러면서 자기들끼리는 러시아어로만 대화하는 등 소련 유학파 출신들이 모이는 일종의 이너 서클이 생기는데 여기에는 1950~1960년대 소련에서 유학했던 1세대 유학파들부터 20대 젊은 층까지 있었습니다.

    1991년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최고사령관 직을 물려주자 사회주의 체제에서 유례없는 권력세습에 크게 반발한 이들은 쿠데타를 준비, 이들은 1993년 김정일을 제거하고 김일성을 국가의 상징으로 내세운 다음에 주체사상으로 왜곡된 북한의 사회주의 노선을 정통 사회주의로 개조한 후 남한을 침공할 계획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군사정변 모의는 최룡해의 매부였던 홍계성이 이끌었고 유학생활을 마치고 조선인민군 부총참보장으로 승진한 홍계성에게 1992년 최고사령관 자리에 오른 김정일이 직접 상장의 견장을 달아줍니다.

    홍계성과 함께 김일성의 외가 친척이었던 인민무력부 작전국 부국장 강영환도 구데타의 핵심 인물이었고 여기에 만경대혁명학원을 졸업하고 프룬제군사대학에 유학한 인민무력부 작전부처장과 전투훈련국장 안종호도 합세합니다.

    그들은 조선인민군 창군 60주년이 되던 1992년 4월 25일 열병식 주석단에 있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탱크로 제거하는 계획을 세웠고 프룬제 유학파 출신의 사단장 5명이 거느린 부대도 쿠데타 계획에 합류, 열병식에 동원된 전차는 프룬제 유학파 출신 김일훈 소장이 관할하는 평양방어사령부 탱크사단 소속이었는데 김일성의 고종사촌인 인민무력부 국장 박기서가 평양방어사령부의 탱크를 동원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 대신 인민무력부 직할부대의 탱크가 열병식에 참가하게 되면서 초기 쿠데타 계획은 실패합니다.

    러시아는 소련에서 공부한 유학생들을 통해 이런 사실을 미리 파악, 첫 쿠데타 음모가 실패하자 기존 KGB의 한 간부였던 사람이 당시 러시아 대사였던 손성필에게 쿠데타 모의를 고발, 김정일은 프룬제군사아카데미 유학생 출신들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들 이라 분노하며 조선인민군의 방첩기관은 인민군 보위국에 이들을 무자비하게 소탕하라 지시합니다.

    1993년 2월 8일 인민무력부 8호동 회의실에서 중대회의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유학생들이 도착하자 인민군 보위국 국장 원응희가 지휘하는 작전조를 투입, 총참모장 최광과 보위국장 원응희가 주최한 이 날 회의에서 최룡해의 매부였던 인민군 부총참모장 홍계성 상장과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 부국장 강영환 중장, 재정국장, 통신국장, 교육국장 등 장령급 지휘관 70여명이 체포됩니다.

    이때부터 1998년까지 5년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유학생들을 대대적으로 숙청, 인민무력부 총정치국과 총참모부는 물론이고 각 군단, 사단, 여단의 모든 소련 유학생 출신들이 모두 조사를 받았고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관 무관 김학산 중장과 부무관이었던 최수연 대좌오 1997년 체포, 1993년 말 감책공군대학에서 재직하던 유학생 17명은 평양역 부근에서 크게 저항해 인민군 보위국 1개 중대가 동원되어 겨우 제압하게 됩니다.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보위국은 북한의 주요 도시들을 검열, 1998년 량강도 혜산시에서만 2백여명의 당, 행정, 사법기관 간부들을 공개처형하거나 비공개로 실시, 당시 량강도 보안국 리성훈 수사처장은 망치로 살해됩니다.

    조선인민국 보위국은 프룬제 쿠데타 모의 사건과 제 6군단 쿠데타 모의사건을 신속히 처리하고 군부 내의 반김정일 세력을 뿌리뽑은 공로로 보위사령부로 승격, 보위국장이었던 원응희는 보위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중장에서 단숨에 대장으로 진급합니다.

    이 사건으로 장령 30여명과 좌급 군관 100여명, 위급 군관 70여명 등 프룬제 군사대학 유학생 출신 도합 200여명이 총살, 살아남은 일부 유학생들은 군복을 벗은 채 지금도 북한 당국의 감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이 사건 이후 북한은 외국에 군사 유학생을 보내지 않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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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약 30년전 최근에 발생한 6군단 모의 구데타 사건이 제일 최근의 일인데 1995년 북한 6군단이 쿠데타를 모의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었다고 알려진 사건입니다. 북한 6군단은 함경북도 지역을 방어하는 향토군단으로서 청진시 라남구역에 사령부를 둔 중국 접경지대의 수비군으로 휘하에 보병 3개 사단, 포병 1개 사단, 방사포 4개 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994년 여름에 김일성이 사망하고 김정일의 승계가 안정되는 와중에 북한 권력이 허점을 보이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정치장교 (장군)은 체제를 뒤엎기로 결심했다가 발각 된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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